150화
문을 열고 들어선 여인은 감정이 복받치는지 한동안 부르르 몸을 떨다가 이내 허물어지듯 절을 하였다.
“소녀, 공자님을 뵈옵니다.”
비담 역시 절을 올리는 여인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매영...그대가 맞구려.”
“흑흑, 다시는 공자님을 못 볼 것이라 여겼는데...이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나 역시 당신을 이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오.”
비담의 영체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매영을 일으켜 세웠다. 비담은 일어선 매영에게 다가가 이내 살포시 끌어안아 주었다. 매영은 비담의 품에서 하염없이 울먹이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매영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자 비담은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 둘 묻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듯 하니 우선 이쪽에 앉읍시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하구려. 부흥상회에 있어야 할 당신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지.”
“공자님이 부흥상회를 떠난 후, 사도련이 보낸 의문의 혈의인들에 의해 상회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전 다행히 잠시 출타 중이었기에 그 화를 면하게 되었지요. 불타오르는 부흥상회를 바라보다 이내 공자님이 화산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생각나 부랴부랴 달려갔습니다.
부흥상회의 일도 전해야 하고......또 공자님도 뵙고 싶어서.”
“그래요? 허나 나는 당신을 화산에서 보지 못했는데...”
“아니에요...제가 시봉세에게 겁탈을 당하고 유린당하던 참혹했던 그 순간......공자님의 음성이 아스라이 들렸답니다. 죽음을 맞이했던 마지막 그 순간에 말이지요.”
“시봉세에게 겁탈을 당했다고요? 어찌된 일인지 소상히 말해보시오.”
“그, 그것이......공자님의 따스한 품에 안겨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급히 화산으로 달려가 공자님이 머물고 계시던 객잔에 당도하였지요. 그러다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는 서희를 보았답니다. 그래서 순간 저도 모르게 공자님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서희로 역체변용하였지요. 그렇게 객잔에 앉아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음식을 먹었는데......그 음식 속에 최음제가 들어있을 줄은......”
“그럼 참혹했던 그날 침상 위에 쓰러져있던 여인이 서희가 아니라 당신이었단 말이오?”
“네, 공자님. 저였습니다.”
비담의 눈이 비통하게 물들었다. 그날의 끔찍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비담은 길게 침음성을 내뱉고는 이내 흐느끼는 매영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여 주었다.
‘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화산까지 달려왔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하였소. 황궁으로 향하던 어느 날 밤, 당신이 내게 보였던 참회와 회한의 눈물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그것을 실천하기도 전에 그리 허망하게 죽었으니 얼마나 원통하였을까.’
비담은 매영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였기에 그저 말없이 어깨만 쓸어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매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숱한 사내들의 하물을 잘라 불구로 만든 것에 대해 하늘이 천벌을 내린 거지요.”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그런데 어찌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 궁금하구려. 내가 알기론 죽으면 망각의 샘을 마시고 모든 기억이 지워진다 들었는데 말이오.”
“염라대왕이 최근 들어온 영체들 중 제법 무력이 강했던 무인들을 따로 빼돌렸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망각의 샘물을 마시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년지투를 대비하여 그리 한 것 같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군. 상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염라대왕까지 욕심에 사로잡혀 인과율을 어기다니. 그건 그렇고 지금 보니 얼굴을 가로지르던 검상이...”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육신에 새겨졌던 상처였기에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다행이오. 그날 밤 당신의 상처에 얼마나 가슴이 저리던지.”
“그날 밤을 기억하시나요?”
“어찌 잊겠소. 내 일부러 당신을 매몰차게 대했으나 그날 이후로 당신 역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는데.”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공자님.”
매영은 다시 감정이 복받쳐 와락 비담의 품에 안기었다.
비담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과거 저편에 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열락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방안.
방안을 가득 채운 뜨거운 열기가 밤을 하얗게 태우던 그 순간. 매영은 자신의 진원지기가 빠져나가며 역체변용술이 깨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매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비담은 그 변화를 곧바로 눈치 챘다. 그리고 드러난 매영의 본 얼굴.
흡사 커다란 뱀이 얼굴에 붙은 것 마냥 매영의 고운 얼굴엔 흉측한 상처가 새겨져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검상. 매영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그저 교합에만 온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그 상처로 손을 뻗어 매만지고 말았다.
움찔.
매영의 몸이 순간 차갑게 식고 말았다. 방안을 가득 채우던 열풍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매서운 삭풍이 자리했다.
매영은 아직도 자신의 내부에서 움찔움찔 몸을 떠는 비담의 물건을 거칠게 뺀 후 그대로 손톱에 내기를 주입했다.
손가락 끝에 생성된 강기를 그대로 휘둘러 비담의 목을 쳐낼 심산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던 본 모습을 들켰기에.
허나 비담은 애초부터 최음제에 중독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미끼로 사용하기위해 중독된 척 했을 뿐. 그래서 매영의 공격을 적절히 피하고,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매영은 자신을 제압한 비담을 향해 온몸이 찢어져라 절규하였다. 그녀에게 있어 얼굴의 상처는 역린이었다. 결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장 쓰라린 상처.
비담은 묵묵히 그녀가 모든 발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마음 같아선 자신에게 독아를 드러낸 그녀를 당장 처단하고 싶었으나 얼굴의 상처가 마음에 걸려 그리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기력을 다 쓴 것인지 아니면 원 없이 분풀이를 했다 여긴 건지 매영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비담은 서두르지 않고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그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일까. 드디어 매영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집안의 유생이었던 그 남자를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 역시 대단한 집안의 규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나름 넉넉한 살림이었기에 아낌없이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지만 그는 철저히 그녀를 이용하고 버렸다. 과거에 합격함과 동시에 매몰차게 그녀의 집안과 그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량한 그 사랑이 뭐기에. 그녀는 그런 그 남자를 잊지 못했고, 여전히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그녀에게 마지막 강수를 두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시정잡배들과 거래를 한 것이다.
그녀를 윤간하라고. 만신창이가 된 그녀 앞에 나타난 그. 그는 비릿한 조소와 함께 엉망이 된 그녀를 내버려두고 사라졌다. 얼굴에 보기 흉측한 긴 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나 모진 생명은 쉽사리 끊어지지도 않았다. 마지막 결심으로 강에 몸을 던졌던 그녀. 허나 운명의 장난인지 그곳을 지나던 무림의 여고수가 그녀를 구했고, 그녀는 그 여고수를 사부로 모시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그녀는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다. 탄탄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찾아가 하물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크게 웃어도 허허로운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참담한 기행은 시작되었다.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풀기 위해. 하지만 바닷물은 마실수록 더 큰 갈증을 유발한다 하였던가. 그녀는 결국 사내와 교접한 후 그 하물을 자르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길었던 매영의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넋두리하듯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애잔하고 슬퍼 보이던지.
그리고 얼마나 큰 상처였기에 눈물마저 메말라 버렸을까. 비담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기다란 검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자신의 손길로 그녀의 아픔이 씻겨나가길 바라며.
움찔.
또다시 그녀의 몸이 떨렸다. 하지만 조금 전에 비해 그 떨림은 미미하였다.
비담은 최음의 성분이 아닌 진심으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날 밤이 다 새도록.
비담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매영은 그날 밤 이후 비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다. 몸과 마음 모두. 허나 비담은 그녀의 진심을 쉽사리 받을 수 없었다. 먼 훗날 그녀의 진심을 받아줄 순 있겠으나 당장은 아니었다.
비담은 그녀의 상처와 이야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 여겼다. 동정심의 발로. 때론 동정심만큼 상대의 진심을 잔인하게 할퀴는 무기도 없었기에 비담은 자중하고 또 자중하였다.
그런데 그럴수록 매영은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비담을 오해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의 계획부터 황궁에서 벌어질 모든 일, 더불어 사도련주의 목적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비담에게 매달렸다.
비담 역시 매영의 태도가 가식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황궁에서의 일이 복잡하였기에 우선은 그냥 넘겼다.
그리고 자신에겐 이미 온 마음을 내어준 서희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리 대했는데 이리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천상계에서 서로를 마주한 지금 이 순간이 더 애틋했는지 모르겠다.
비담은 가벼이 떨고 있는 매영의 영체를 더욱 강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내 곧 돌아와 그대와 함께 이곳에서 지낼 것이니.”
“흑흑, 기다릴게요. 얼마의 시간이 흐르던 공자님을 꼭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이구려.”
“상공.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저 역시 이곳에서 상공과 서희가 꼭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다녀오리다.”
한줄기 하얀 빛과 함께 비담의 영체가 사라졌다. 매영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씩씩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짧았지만 서로를 확인하기엔 전혀 모자람이 없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