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모든 영체가 길천의 입을 주시했다. 길천은 그 순간을 음미하듯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이내 입을 열었다.
“동쪽 하늘을 다스릴 동천왕은 검제 설표, 서쪽 하늘을 다스릴 서천왕은 천마 구자혁, 남쪽 하늘을 다스릴 남천왕은 초하련이다. 그리고 북천왕은...마지막 북쪽 하늘은 임시로 매영이 맡는다.”
“매영? 임시?”
“어째서 비담님이 맡지 않고...”
“혹시 염부의 염라대왕을 생각하고 계시나?”
“그러게. 설마하니 엄청난 활약을 하신 비담님이 누락되지는 않았을 터이니.”
300여 영체가 모여 있던 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왕의 자리를 받을 거라 여겼던 비담의 이름 대신 듣도 보도 못한 매영이란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천상계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영체였기에 그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매영의 이름을 들은 비담에 비하면 이들의 놀라움은 새 발의 피였다. 비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멍하게 굳어 있는 비담을 한 차례 응시한 길천은 이내 염라대왕으로 300 영체의 돌격대장 격이었던 무당의 무허자 장운천을 내정했다. 그런 다음 일사천리로 각 부의 문, 무신 요직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었던 논공행상이 끝나고.
모든 것이 깔끔히 정리된 장내를 한 차례 둘러본 길천이 만년지투의 끝을 알렸다.
“자! 이것으로 모든 논공행상까지 마무리 되었으니 진정 만년지투가 끝이 났다 하겠다. 그래서 짐은 오늘 저녁 옥황궁에서 새로이 임명된 왕들과 문무대신, 더불어 다른 모든 영체들을 초대하여 큰 연회를 베풀까 하노라. 모두 늦지 말고 참석하거라.”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상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매영이란 영체와 비담에 대한 수많은 의혹이 남았지만 새로이 등극한 상제의 지엄한 황명이었기에 모두들 수긍하고 이내 목청껏 만세를 외치며 함성을 질렀다.
떠들썩했던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길천은 조용히 비담 곁으로 다가갔다.
“많이 놀랐느냐?”
“아니옵니다, 폐하. 다만 제가 알고 있던 이름이 호명되어 저도 모르게 당황하였사옵니다.”
“음, 보는 눈이 많아 불편하구나.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길천은 비담을 데리고 서둘러 옥황궁의 심처에 마련된 별궁으로 향했다. 천마와 검제, 하련 역시 조용히 길천의 뒤를 따랐으나 길천의 명령으로 인해 별궁 안으론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담이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네들은 이곳에 남아 연회 준비를 해주게. 임명식과 연회를 동시에 진행할 것이니 차질 없이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길천의 안색이 진중하였기에 셋은 깊게 읍을 한 후 서둘러 물러갔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흐르는 정갈한 별궁의 내실.
둘만 남게 되자 길천은 곤룡포와 면류관부터 소멸시켰다.
“후우,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이것도 하던 놈이나 하는 거지 처음 하려니까 거추장스럽구나.”
“그래도 잘 어울리십니다.”
“흠흠, 다행히 보는 눈은 있구나. 너도 알다시피 예전 도색성으로 활약하며 강호를 주름잡았을 때부터 내가 뭘 걸치던......”
“그만!! 제발 그만하세요. 형님 자랑 듣다간 일 년 열두 달로도 모자라니 다음에 합시다. 그건 그렇고 매영 일은 어찌 된 겁니까? 제가 알고 있는 그 매영인가요? 아님 동명이인입니까?”
“아차차! 또 옆길로 샐 뻔 했구나. 시간이 없으니 간략히 설명하마. 혹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거든 나중에 질문하고, 매영은 네가 알고 있는 그 아이가 맞다. 매영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겠으나 모든 설명이 끝나면 자연히 만나게 될 터이니 나중으로 미루자.”
비담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으나 길천은 애써 외면한 채 허공에 팔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예전에 보았던 ‘천생지사’에 새겨졌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이 둥둥 나타났다.
“예전 담이 네가 한 번 보았던 신성한 문자니라. 전임 상제와 한 판 뜨고 이기니 자연히 나에게 인계가 되더구나.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략 살펴본 내용으로 미루어 그동안 전임 상제들이 기록한 비망록 같더구나.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차분히 읽어봐야겠으나 우선 중요한 부분이 몇 군데 눈에 띄어 이리 펼친 것이다.
첫 번째로 담이 너를 북천왕에 제수하지 않은 이유는 너는 이곳 천상계에 머물러선 안 되는 영체이기 때문이다. 전임 상제의 욕심으로 인과율을 어긴 채 이곳에 끌려왔기 때문에 만년지투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원래 있었던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에 맞다.
그리고 두 번째로 너의 막대한 영력은 이곳 천상계에 봉인되어야 한다. 나중에 네가 육신의 허울을 벗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봉인이 해제되어 본연의 영력을 되찾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이미 신의 반열에 올라선 너의 영력을 지상에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질서와 지엄한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나 역시 어쩔 수 없구나.
그리고 네가 들으면 매우 기뻐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긴 하나 우리가 알고 있던 바와 다르게 서희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내막은 매영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겠으나 나 역시 매영을 만난 시간이 짧았기에 세세한 부분은 알지 못하니 그리 알고 그 아이에게 듣도록 하여라. 단,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시간으로 비록 하루 정도의 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네 육신에 무슨 변고가 생겼을지 모르니 서둘러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년지투 기간엔 지상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단다. 너도 보았다시피 신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년지투가 벌어지며 염라대왕을 비롯한 모든 대소신료들과 영체들이 쟁투에 뛰어들었지. 방금 비망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그러한 연유로 만년지투가 벌어지는 기간엔 지상의 시간이 멈춘다는구나.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나 역시 이 부분은 납득했으니 비망록에 기록된 사실이 맞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두서없이 설명했구나. 혹 궁금한 점이 있느냐?”
길천은 지상에 남아 있는 비담의 육신에 혹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길까 저어하여 빠르게 설명한 후 그를 바라보았다.
“매영은 어찌 만나신 건가요? 그녀의 기억이 온전하던가요?”
“그 아이는 방금 염부와의 전쟁에서 우연히 만나 내가 따로 보호하였다. 곧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하여 많은 것을 물어보지 못했으니 네가 직접 묻는 게 나을 듯싶구나.”
“그렇군요. 그럼 형님께서 임시로 북천왕에 앉힌 것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인가요?”
“그렇다. 아마 내가 옆에 두지 않았다면 다시 염부로 끌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우선은 그리 조치를 취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만년지투가 끝나면 다시 염부로 가야한다고 말하기에 임시로 지근거리에서 나를 보좌하고, 또한 내가 보호할 수도 있는 왕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래야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와 만날 수 있을 터이니.”
“고맙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셨네요.”
“네가 언제 이곳에 돌아올 지 알 순 없지만 만년이란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북천왕의 자리를 제수할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내 옆을 든든히 지켜줘야 하느니라.”
“네, 그렇게 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궁금한 점은 없느냐?”
“네, 형님. 모두 이해했습니다.”
“애석하지만 짧은 이별이니 기꺼이 감수하마. 부디 다시 돌아가 서희 그 아이와 재회하길 바라마.”
“고맙습니다.”
“그리고 남은 천마와 검제, 하련이에겐 내가 설명할 것이니 그 아이를 만나는 데로 바로 떠나거라.”
“조금 송구스럽긴 하나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예서 기다리면 곧 그 아이가 들어올 것이다. 곧 다시 재회할 것이기에 따로 작별의 말은 하지 않으마.”
“소제, 형님의 은덕 영원히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새삼스럽게 우리 사이에. 그럼 잘 다녀오거라.”
“예, 곧 뵈올 것이니 형님께서도 그동안 천상계를 잘 다스려 주십시오.”
“흐흐, 알았으니 걱정 말거라. 그럼.”
길천은 가슴 한 편이 먹먹하였기에 짧게 웃음 지은 뒤 이내 등을 돌려 별궁 바깥으로 나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였으니 몸 성히 잘 다녀오거라.’
비담은 돌아선 길천의 등을 향해 최대한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짧은 이별이긴 하였으나 비담 역시 가슴 한 곳이 아려왔기에.
그리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별궁의 문이 열리며 비담이 익히 알고 있던 그녀가 조용히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