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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148/154)

148화

제 16 장 거자필반(去者必返)

마지막 쟁투임을 직감한 것일까. 전투의 무게와 치열함을 대변하듯 주변을 에워싼 영체들이 일제히 거리를 격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곤 각자의 진영을 이룬 채 두 거인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찰나의 대치상황이 끝나고. 먼저 움직인 쪽은 상제였다.

거대한 힘을 담은 영력덩어리를 만들어낸 상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길천을 향해 던졌다.

슈우욱

전광석화와 같이 날아든 영력덩어리. 길천은 묵묵히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그것을 지켜보다 이내 한 손을 휘저어 튕겨버렸다.

이화접목의 수법.

너무나 쉽게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상제는 짧게 신음성을 토하고 말았다. 지닌바 영력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으나 문제는 간단히 시전 한 저 수법. 흔히 무림의 고수라 불리던 자들이 사용하는 기술. 불과 몇 백 년 전부터 하나 둘 천상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저 영체들이 상제는 두려웠다.

싸움에 특화된 자들. 치열하게 오로지 싸움만을 위한 기술과 수양을 갈고 닦은 자들.

상제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듯 이내 의지를 다잡고 다시 한 번 수십의 영력덩어리를 생성해 뿌렸다.

하지만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길천의 눈에 상제의 공격은 그저 단순함 자체였다. 길천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수많은 공격들을 슬쩍슬쩍 방향을 바꾸어 쳐냄과 동시에 현란한 보법으로 피해버렸다.

자신의 공격을 얄미울 정도로 가볍게 피해내는 길천을 보며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상제는 그저 담담히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마지막,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거대한 상제의 영체 주변으로 막강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길천 역시 상제가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끝을 볼 심산이군. 그럼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줘야겠지.’

길천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내 자신의 모든 영력을 한 곳으로 모았다.

푸아악

공간이 터져나가며 한 줄기 섬광이 상제의 가슴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그대로 내달려 길천을 향해 덮쳐들어갔다. 길천 역시 자신을 향해 치달려오는 빛을 마주한 순간 한 점에 모아둔 영력을 내쏘았다.

쿠아아앙

천상계 전체를 부르르 울리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두 기운이 가운데 점에서 부딪혀 터져나갔다.

용호상박.

순수한 힘으로 응집된 두 기운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성난 파도처럼 그 세를 더욱 불려나가며 진하게 물든 길천의 힘이 점점 상제의 힘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상제는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쏴아악

길천이 쏘아 보낸 한 줄기 빛이 천상계의 대지를 양분하며 지나갔다.

빛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 어디에도 상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휘청.

막대한 영력을 한 번에 쓴 여파였을까. 길천의 신형이 잠시 휘청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담이 바람처럼 날아가 길천을 부축하였다.

“괜찮으십니까?”

“후우, 괜찮다. 걱정하자 말거라.”

“하오나...”

“아니야, 정말 난 괜찮다. 그저 마지막 선물을 과하게 셈하느라 잠시 그랬던 것뿐이다. 그나저나 담아?”

“네, 형님.”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소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부탁하마.”

길천은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담은 걱정스레 길천을 바라보다가 이내 전장에 남아있던 남천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치 빠른 하련과 천마, 검제 역시 서천왕을 향해 몸을 띄웠다.

반 시진 후.

소멸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남천왕과 서천왕의 영체가 차례로 전장에서 사라졌다. 비담은 한 발 더 나아가 천계의 고위급 영체들까지 모두 소멸시켰다.

그 사이 어느 정도 영력을 회복한 길천이 흐뭇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비담 일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슈우욱 슈우욱 쿠쿠쿵

길천의 영체에서 시작된 작은 마찰음과 눈부신 빛들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작은 소란과 함께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울타리가 길천을 촘촘히 에워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알을 품듯 따스하게 감싸던 황금빛 둥지가 걷히며 길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거대한 황금용 한 마리가 전신을 휘감으며 수놓아 진 곤룡포에 천상에만 존재한다는 영롱한 천옥이 알알이 드리워진 황금 면류관까지.

길천의 몸에서 세상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압도하는 지엄한 권위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비담을 비롯한 천마와 검제, 하련은 일련의 사태에 잠시 당황하였으나 이내 길천의 변화된 모습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부복하며 외쳤다.

“미천한 신들이 새로이 탄생하신 상제를 뵈옵나이다.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경하 드리옵나이다.”

오롯이 서있는 길천을 제외한 모든 영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새롭게 다가오는 만년을 이끌어갈 상제의 탄생과 질서를 축하하며.

길천의 영체가 부르르 떨려왔다.

바야흐로 이곳 천상계에 자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던 길천이 이내 정신을 수습하곤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고맙소. 허나 이 모든 영광은 경들의 노고가 지대했기에 가능한 것이니 그만들 일어나시오. 짐은 오늘의 이 영광을 모두 함께 누리고 싶소이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길천의 영체로부터 부드러운 기운이 퍼져 나와 부복하고 있던 수많은 영체들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길천은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의 영체들을 하나하나 따스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곤 이내 입을 열어 중대한 사실을 선포했다.

“그리고 짐은 이 자리에서 만년지투가 끝났음을 선포하는 바이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피를 말리던 쟁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소멸의 위기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영체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수많은 영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길천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짐을 도와 새롭게 다가올 만년을 준비할 자들을 호명하겠소.”

길천의 한마디에 주위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전투가 끝난 자리, 드디어 논공행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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