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154)

147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인 전장 한 복판.

염라대왕의 눈에 이질적인 장면들이 거듭 잡혔다. 열심히 싸우던 염부의 고위급 영체들이 하나 둘씩 가랑비에 젖듯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워낙 은밀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 자꾸 신경을 거스르는 기분 나쁜 느낌에 싸우는 것을 잠시 미룬 채 자세히 관찰하고 나서야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된 특이점.

염부의 고위급 영체들이 사라지는 곳에선 어김없이 화려한 빛무리가 난무한다는 점이었다. 거듭되는 아군의 소멸에 큰 위기감과 분노를 느낀 염라대왕은 이내 몸을 날렸다.

“네 이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그리 설치는 것이냐? 쥐새끼마냥 그리 숨어 싸우지 말고 당당히 나서거라.”

전장을 압도하는 흉폭한 기세가 염라대왕의 전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를 감지한 다섯 무리의 영체들이 일제히 빛을 쫓는 부나방처럼 염라대왕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제 말이 맞죠? 머리 싸매고 전략 짜봤자 소용없다니까요. 저리 알아서 턱턱 걸려주니 이건 뭐 녹림왕과 비교하는 것조차 아깝네요. 요즘 대가리들의 미덕은 끝을 알 수 없는 단순함인가 봐요.”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왜요? 어디 찔리세요? 흐흐, 그렇게 말한 다음 형님을 두고두고 놀리고 싶지만 어디 저렇게 단순무식한 놈들과 형님을 비교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래도 네가 보는 눈은 있구나.”

“그래서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것 아닙니까. 그나저나 알아서 진수성찬이 떡 차려졌으니 맛있게 먹자고요.”

“아무렴. 두말하면 입 아프지.”

길천과 비담은 300 영체들과 함께 염라대왕을 빙 둘러싼 채 자신들의 성명절기를 일제히 퍼부었다. 엄청난 빛의 소용돌이와 함께 영력으로 형성된 가지각색의 다양한 무기들이 여름철 소나기처럼 염라대왕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염라대왕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엄청난 영력 앞에 다급히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 방어막을 형성하였다.

투두두둥 콰쾅콰쾅 퍼버벅

다양한 소리와 함께 다채로운 빛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한차례 공격이 끝났음을 알아챈 염라대왕이 방어막을 거두고 반격을 가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들려온 느물느물한 음성과 공격에 그만 황급히 다시 방어막을 쳤다.

“인사는 이정도로 나누고, 진짜 간다. 긴장해.”

길천은 조그마한 부채 하나를 생성해 미증유의 거력을 담았다. 그런 다음 눈에 보이지도 않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염라대왕의 방어막을 향해 쏘아 보냈다.

쾅!!!!!!!

일직선으로 내달리던 한 줄기 빛이 그대로 염라대왕의 방어막을 뚫고, 그의 복부에 작렬하였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의 복부가 휑하니 뚫려버렸다.

넋 놓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수많은 염부의 영체들이 다급히 염라대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왕을 보호하라.”

“귀찮은 것들. 담아? 저것들 거치적거리지 않게 알아서 막아라.”

“한 놈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소제가 막겠습니다.”

비담은 길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영체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길천은 산책이라도 나온 양 느긋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염라대왕에게 다가갔다. 물론 다가가는 걸음 하나에 빛으로 화한 부채 하나씩을 날리면서 말이다.

쾅!!!!!

푸스스스

다급히 자신의 영력을 이용해 구멍 난 영체의 복부를 복구하던 염라대왕의 오른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쾅!!!!!

주르륵 휘청

이번엔 염라대왕의 오른쪽 다리가 사라지며 휘청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염라대왕은 혼신의 힘을 다해 사라진 영체의 일부분을 복구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복구되는 속도보다 소멸되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영체는 속수무책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던 염라대왕의 영체.

길천이 열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남아있는 부분은 보기 흉측할 정도로 일그러진 몸체와 머리 뿐이었다. 길천은 쓰러져있는 염라대왕의 남은 영체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으이. 천상계가 마련한 만년지투의 안배에 따라 진정한 안식에 드시게. 그럼.”

길천의 손끝에서 시작된 반짝이는 작은 구체가 덩그러니 놓여있던 염라대왕의 영체 위로 내려앉았다.

푸스스스스

염라대왕의 영체가 가루로 화해 흩날렸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완벽한 소멸이었다. 마지막 순간 염라대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여긴 것은 길천만의 착각이었을까. 길천은 짧은 감상을 그 자리에 묻은 채 서둘러 비담에게로 향했다.

“염부의 모든 영체들은 들으라. 지금 이 순간부터 염라대왕의 위는 내가 이어받았으니 그만 싸움을 멈추고 부복하라.”

염라대왕의 영력까지 흡수한 길천의 위엄이 순식간에 장내를 장악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던 영체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하나 둘 그 자리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새로이 탄생한 염라대왕을 향해서.

길천의 활약으로 염부 쪽은 손쉽게 마무리되었다.

“그럼 이제 천계 쪽만 정리하면 되겠네요, 형님.”

“가자. 막 내리러.”

“그래야죠. 그나저나 둘이 얼마나 치열하게 맞붙었던지 저쪽 역시 최상위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영체의 수가 얼마 안 되더라고요.”

“그럼 최상위 놈들만 소멸시키면 만년지투가 마무리 되겠구나.”

비담은 대답 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천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비담과 하련, 천마와 검제를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굳센 철벽처럼 서있는 300여 영체들에게도 강한 신뢰와 더불어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그럼 깨끗하게 정리하러 가보자.”

길천이 선봉에 나서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천계 쪽 진영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근접해서 호위하듯 300 영체들이 뒤따랐고, 염부에서 거둬들인 나머지 수백의 영체들이 가장 후미에서 뒤따랐다.

갑자기 전장에서 사라진 거대한 존재감.

옥황상제는 자신을 위협했던 만년지투의 가장 큰 호적수가 소멸되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측정불가의 어마어마한 기운. 아마도 저 기운을 지닌 영체가 자신의 호적수를 소멸시켰으리라.

점점 자신을 옭아매는 운명의 굴레를 느꼈음일까. 옥황상제의 눈빛이 허허롭게 변했다.

“허허허, 결국 이리되는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것을 무슨 미련이 남아 그토록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꼬. 그때 차라리 욕심 부리지 않았다면 이리도 허무하진 않았을 터인데. 아마도 저 기운의 정체는 길천이겠구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허허롭던 눈빛은 이내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이리 순응했다면 좋았을 것을. 만년이란 시간동안 수양을 쌓았음에도 결국 탐욕이란 요물로부터 벗어나질 못했구나.’

옥황상제는 차분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을 맞아들였다.

상제가 느꼈던 허허로움이 전염된 것일까.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싸움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멈췄다. 그리곤 남아있던 천계의 영체들이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제처럼 그들 역시 조용히 기다렸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그들 눈앞에 길천이 다수의 영체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리곤 이어지는 짧은 말 한 마디.

“끝냅시다.”

“그러세.”

만년지투가 결국 그 끝을 향해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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