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수천의 영체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광활한 벌판.
그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새로이 등장한 무리의 수는 정확히 300이었다. 그 무리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몇몇 인물들이 언덕 아래 보이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후우!! 드디어 돌고 돌아 천계의 중앙에 당도했구나.”
“그러게요. 동조할 세력까지 규합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그래도 이만하면 꽤 성공적이지 않느냐. 다행히 아직 서로 붙기 전에 도착했으니 시간도 적절히 맞추었고.”
“다 형님의 복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숫자가 꽤 되네요? 이곳까지 오면서 소멸시킨 영체의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죠.”
“아마도 염부의 영체까지 모여 있어 그럴 거다.”
“그렇군요. 그동안 소멸된 영체의 수도 적지 않을 텐데 예상보단 많네요.”
“후후, 걱정할 것 없다. 우리도 그만큼 강해졌으니.”
“헤헤, 제가 언제 걱정했다고 그러세요? 걱정은 저 아래에 있는 저 녀석들이 해야죠.”
옆에서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검제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툭 던졌다.
“비아우가 말한 만년지투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구먼.”
“만년지투의 의미? 자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언덕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며 길천과 비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마(구자혁)가 불쑥 끼어든 검제(비천검 설표)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햇빛이 비치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울창하면 어린 나무들은 자라지 못하는 법. 적절히 가지치기를 해줘야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나지 않겠는가. 불현듯 저기 모인 수천의 영체들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라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구먼. 만년 동안 정체된 채 계속해서 영체들이 이곳 천상계에 쌓여만 갔을 테니 저런 식으로 흔들고 정리를 해줘야겠지. 그래야 다가오는 만년을 준비할 수 있을 터. 그럼 자네 생각엔 언제 만년지투가 끝나리라 보는가?”
이번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비담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도 소제의 생각으론 누군가 승자가 결정되어야 만년지투가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도전하는 쪽이든 응전하는 쪽이든 말이죠.”
“나도 담이 말에 십분 공감하네. 이곳까지 오면서 곰곰 생각해보았는데 어느 정도 무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적절한 수의 영체들이 소멸되었을 걸세. 그걸 바탕으로 대규모의 무리가 만들어지면 이제 그들끼리 진하게 한 판 붙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 여기서 승자가 결정되면 비로소 만년지투 역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걸세.”
“그럼 길천 형님과 비 아우의 말을 종합해 보면 만년지투가 얼마 안 남았단 뜻이군요?”
“얼마 안 남은 것이 아니라 이번이 마지막 쟁투일걸세.”
길천이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길천의 말을 들은 천마와 검제, 하련 역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눈치였다. 비담은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자 서둘러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들으신 데로 이번이 가장 중요한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가 부족하나마 작전을 좀 짜봤습니다. 우선 만년지투에 참여한 염부와 천계의 대치상황을 보니 매우 단순합니다.
진영이랄 것도 없이 서로 마주본 상태로 대치하고 있고, 형님들도 알다시피 영체는 따로 보급이 필요 없죠. 따라서 저희 역시 가장 단순한 전략으로 치고 들어간다면 아마도 큰 혼란을 야기함은 물론 어부지리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한 전략? 그게 뭔가?”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소수정예란 점입니다. 개개의 영체가 지닌 영력이 저쪽의 영체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제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이용한 분란의 조장입니다.
우선 길천 형님과 설표 형님, 구자혁 형님이 247의 영체를 데리고 보이는 곳 왼쪽에 있는 염부의 후방에 조용히 매복해 계십시오. 그럼 소제가 하련이와 함께 나머지 48을 데리고 천계의 뒤쪽을 쳐 그대로 관통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인한 천계 쪽 영체들을 염부 쪽으로 끌고 가 서로 부딪히게끔 만드는 거죠. 그런 연후에 소제가 이끄는 별동대는 신속히 전장을 이탈해 형님들이 계신 곳으로 합류하겠습니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가급적이면 강한 영체들을 노려주세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혼란을 틈타 먹음직스러운 대어만을 노려라?”
“바로 그겁니다. 뭐 운이 좋으면 상제나 염라대왕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건 욕심일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조금 눈에 띈다 싶은 강한 놈들 위주로 소멸시켜 주세요.”
“오냐, 알았다. 그럼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지금 당장 시작하자.”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빙 둘러 염부의 후방으로 이동하세요. 제가 나머지 인원들에게 작전을 설명한 뒤 저 역시 출발하겠습니다.”
“그럼 신호는 무엇으로 할까?”
“후후, 따로 신호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사고방식들이 워낙 단순해서 이런 간단한 계략에도 손쉽게 걸려들 것입니다. 대치하고 있는 양 진영에 변화가 생기고 혼란이 야기되면 ‘시작했구나.’ 여기시면 됩니다.”
“알았다. 그럼 먼저 가보마.”
“다시 한 번 당부 드리지만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형님들의 영력이 막강하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포위를 당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심하마. 너도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
“예. 그럼 잠시 뒤에 뵙죠.”
무리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5명은 이내 서로의 눈을 바라본 후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결의를 대신했다. 그런 다음 비담의 말대로 영체들을 차출하여 작전에 대해 소상히 설명한 후 각자 위치로 이동하였다.
길천 일행이 먼저 숨죽인 채 조용히 이동할 그 시각.
비담은 하련을 포함해 자신 앞에 서 있는 영체들을 쭈욱 한차례 둘러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작전은 매우 단순하지만 위험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임무이기에 그만큼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선택된 너희들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고, 그렇기 때문에 난 너희들을 철썩 같이 믿는다. 그럼 세세한 작전 계획을 설명하겠다.
너희들도 보다시피 천계 진영의 가운데에 상제를 포함한 다수의 고위 영체들이 포진해있다. 그들을 피해 천계 뒤쪽을 급습해 갈지(之)자 형태로 휘젓는다.
그런 다음 최대한 고위 영체들을 피해 천계 진영을 관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염부 쪽의 별동대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저들의 분노와 혼란이 가중될 테니까. 적절하게 한마디씩 염장을 지르며 교란시켜라. 그럼 저들이 우리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꼬리에 달린 그놈들을 끌고 염부 쪽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전장을 이탈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런 연후 염부 뒤쪽에 포진하고 있는 본대에 합류해 함께 힘을 합쳐 고위 영체들을 사냥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번 작전의 성패는 속도다.
욕심이 나더라도 결코 독자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 더불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 역시 용납하지 않겠다.
끝으로 내 허락 없이 허무하게 소멸되는 것 역시 용납하지 않겠다. 이상!! 혹시 작전에 대해 궁금한 점 있나?”
“......”
침묵으로 각오와 결의를 대신하는 영체들이었다.
“좋다. 그럼 그대들의 무운을 빌며 작전을 시작하겠다.”
비담은 한차례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천계 진영의 뒤쪽으로 방향을 잡아 이동했다. 비담은 면밀히 주위를 살피며 작은 변수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반 시진 후.
비담이 이끄는 별동대는 목적했던 천계의 진영 후방 깊숙이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비담은 예리한 눈으로 천계진영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인지 역시나 예상대로 경계가 느슨하구나. 하련이는 내가 조금 전에 부탁한대로 가장 후미에서 낙오한 녀석들을 수습하고, 강한 영체를 만나 고전하는 녀석들을 도와주거라.”
“네, 숙부님. 저만 믿으세요.”
“그래, 너를 믿고 돌진하마. 그럼, 화끈하게 놀아보자.”
“호호, 좋아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비담이 이내 허공에 부채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부채는 비담의 손짓에 따라 천계 진영의 후방에 위치한 영체들의 머리 위로 까마득히 치솟더니 이내 작은 점으로 화해 사라졌다.
일 초, 이 초, 삼 초......십 초.
슈우욱 콰콰쾅
작은 점으로 변했던 부채가 어느새 엄청난 크기로 변해 천계 진영 후방의 위쪽 모서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후후, 그럼 가볼까.”
비담의 신형이 아래쪽 모서리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물론 비담을 따르는 별동대 역시 한 마리 비조가 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