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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144/154)

144화

의식이 끝난 후.

비담은 할 말이 있다며 천마와 검제를 데리고, 길천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였다.

길천과의 거리가 적당히 벌어지자 비담은 그제야 천마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마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비담이라 합니다.”

“어르신?”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영력을 지닌 존재가 갑자기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접자 천마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길천과 거리를 둔 이유가 기강을 잡거나 훈계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이 배가 됐던 것이다.

“하하,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천마 어르신은 모르시겠지만 300년 뒤 먼 후손 중에 저와 미래를 약속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와 저 둘 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죽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어르신을 대하는 것이니 그리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닌바 영력의 차이가 이리 큰 데 제가 어찌...?”

“물론 길천 형님 앞에서는 이리 대접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게 말씀을 좀 가려서 살살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아무튼 지나간 일이니 그건 어쩔 수 없고 앞으로도 이리 사적인 자리에선 어르신으로 모실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그리고 너?”

비담은 멀뚱히 서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나를 부른 것이더냐?”

“귓구멍이 막혔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자 거기 너밖에 더 있냐? 정신 안 차릴래?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눈치나 살살 보고 말이야.”

“크흠, 천마에게 어르신이라 칭했으니 당연히 그 지기인 나에게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줌이...”

“지랄하네. 어디서 공짜 마차를 얻어 타려고 그래? 억울하면 누구처럼 후손을 잘 두던지, 아님 지닌바 능력이 탁월하여 대접을 받던가.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무림에서의 배분이니 하는 그딴 쓰잘데기 없는 것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동동 흘려보내라. 앞으로 최소 만 년 동안은 이곳에서 미우나 고우나 뒤엉켜 지낼 것이니 서열정리는 확실히 해 두자고. 그리고 한 번만 더 ‘나’ 라며 반말을 서슴없이 뱉고 대접 운운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성질머리 고약하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해라, 알았어? 엉? 왜 대답이 없어? 검제 너 죽고 싶냐? 빨리 대답 안 해?”

“예. 아, 알겠습니다.”

검제의 꼿꼿했던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접혀졌다. 비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아! 그리고 앞으론 우리 도.색.성. 길천 형님께 주군이라 부르고 지근거리에서 보필 잘해라. 오늘처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한다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잘근잘근 씹어 먹어줄 테니까 알아서 미리 잘 모셔. 알았어?”

“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이쯤 해두고,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한 번만 얘기할 거니까 잘 들어. 어르신은 잠깐 이쪽에 앉으시지요. 넌 서서 들어, 임마. 어른들 얘기하는데 어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엉덩이를 붙이려들어? 정말 정신 안 차릴래? 확 그냥.”

비담이 손을 들어 내리치는 시늉을 하자 검제는 그만 새우처럼 움찔 몸을 말고 말았다. 그리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만만치 않았는지 눈물까지 찔끔 맺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천마마저 동화되어 같이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곳에서 300년이나 지냈으면 알아서 주제파악 정도는 했을 터인데 눈치가 없는 건지, 꽉 막힌 건지. 아무튼 좋게 말하는 건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턴 진짜 내리친다.

흠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만년지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터이니 잘 들어. 어르신도 유심히 잘 들으세요. 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알겠습니...아니 알겠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검제를 돌아보는 천마였다. 오묘한 표정으로.

비담은 황금선도와 만년지투에 얽힌 비사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듣고 있던 천마와 검제 입장에선 기함을 할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둘은 요 근래 당했던 여러 가지 변화와 일련의 사태들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비밀 하나 더 말씀드리죠.”

“아직도 뭐가 남았는가?”

“후후, 당연히 남았죠. 어떻게 길천 형님이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했는지, 저와 하련의 영력이 일취월장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구먼. 그게 아직 남아있었군.”

“이제 한 배를 탔으니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뭐,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영체를 예전 육신이라 생각하고, 영력을 내기라 생각하면 됩니다.

과거 무림에서 활동하던 당시처럼 심법을 이용해 영력을 돌리시면 됩니다. 그럼 과거처럼 영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져 훨씬 효율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설명 드렸듯 만년지투 기간엔 다른 영체를 소멸시키면 그 영력들이 고스란히 구성원들의 수에 맞춰 나눠집니다. 그래서 저와 하련이의 영력이 강해진 것이고요. 자! 그럼 더 이상 시간 지체하지 마시고 한 번 해 보세요.”

비담의 말에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천마가 이내 자세를 고쳐 잡고 정좌하여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였다. 검제 역시 비담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이내 천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똑같이 영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담은 이내 길천을 호출하였다. 서로 담소를 나누던 길천과 하련은 비담이 부르자 한달음에 달려와 둘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어찌 됐느냐?”

“형님이 시키신 데로 처리했습니다.”

“잘 했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들이니 회유하려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섞을 수밖에.”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것 같은데요?”

“흐흐, 모르는 소리. 저것들 자존심이 얼마나 쌘 데. 네 말대로 천주이성이니 뭐니 하며 100년 가까이 무림에서 떠받들려졌는데 한 번은 확실하게 깔아뭉개야지. 그래야 만 년 동안 지내기가 수월할 게다. 이제 깨어나는 데로 슬슬 당근을 줘야지.”

“형님이 하도 부탁하셔서 들어드리긴 했는데 영 적성에 안 맞아 못하겠네요. 다음부턴 저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세요. 아주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 참느라 애먹었잖아요.”

“한 번이면 족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나저나 얘기는 모두 해줬겠지?”

“네. 다 알고 있으니 두 분 깨어나시면 형님이 마무리하세요.”

“오냐, 알았다.”

길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영력을 제어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천마와 검제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천마와 검제에게 앞서 세 영체에서 일어났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어떠냐? 예전 무림에 있을 때랑 똑같지?”

둘을 향해 길천은 느물느물 웃으며 물었다.

눈을 뜨고 자신의 내부를 살펴보던 천마와 검제 둘은 똑같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어줍지 않게 영력 덩어리나 생성해서 날릴 때하곤 차원이 달랐다.

“내가 잘난 덕분에 자네들이 이런 호사도 누리는 게야. 그리고 조금 전에는 내가 조금 흥분했으이. 그래도 동시대를 살았던 친우였는데 그리 매몰차게 깎아내리니 내 기분이 어땠을 지 짐작해보게. 많이 섭섭했으이. 자네들에게 함부로 대한 의제는 내가 크게 나무라고 잘 타일렀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지랄 맞아 욱하는 성격이 가끔 있어서 그렇지 본성은 아주 순박하고 착한 아이라네. 그리고 서희라고 천마 자네의 먼 후손인데 그 아이랑 인연도 닿아있으니까 아마 앞으론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걸세.”

“고맙네, 도색성.”

“흐흐,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고마워하고 그러나. 그런데 한 가지 조금 걸리는 게 있으이.”

“뭔가? 어서 말해보게. 우리 사이에 거리낄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서 속 시원히 말해보게.”

검제는 방금 당한 수모는 깨끗이 잊은 듯 열성적으로 길천의 말에 호응하였다.

“사적으로야 예전처럼 지내도 상관없는데 앞으로 내가 상제의 자리에 앉으면 지켜보는 눈이 많을 거란 말일세.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야 예전의 일들을 추억하며 즐겁게 지내도 하등 상관없네만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 공적인 자리에선 주군과 신하로서 지내야한다는 것이지. 아마 많이 불편할 터인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공과 사는 명확히 구분해야지. 이리 우리를 내치지 않고 대접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후후,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대신 내가 왕 자리 하나씩은 약조함세.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지 뭐. 동서남북 중 자넨 어디가 좋은가?”

“벌써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들도 내 영력을 봐 놓고 그러나. 상제랑 붙어도 끄떡없으니 어서 말해보래도?”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마가 이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예전 천마신교가 자리하던 곳이 서쪽이니 나는 서쪽으로 하고 싶네.”

“응응,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그럼 검제 자네는?”

“그럼 나는 동쪽으로 하겠네.”

“좋아, 좋아. 그럼 서천왕은 천마 자네가 맡고, 동천왕은 검제 자네가 맡게. 북천왕은 담이 녀석한테 맡기고, 마지막으로 하련이는 남천왕을 주면 되겠군. 이걸로 왕의 자리까지 모두 내정했으니 이제 문신과 무신들을 규합해 보세.”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을는지 걱정이 되네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걱정하지 말래도. 담이 녀석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영체가 소멸되면 그 영력은 고스란히 우리들이 나눠가질 수 있다네. 상제가 어찌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서쪽과 남쪽을 마저 돌며 성에 안 차는 것들은 소멸시키고 필요한 놈들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되네. 그럼 아마도 많은 힘이 쌓일 걸세.”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검제가 길천의 손을 덥석 잡으며 거듭 사의를 표했다. 길천은 천마의 손까지 끌어와 셋이서 함께 손을 맞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머지않아 이곳 천계에도 우리들의 세상이 다시 도래할 걸세. 밝은 미래를 위해 힘차게 출발해보자고.”

“그러세. 하하하하!!!”

비담은 셋의 웃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은근슬쩍 끼어들어 자신이 욱해서 그런 것임을 거듭 사과하였다. 천마와 검제는 방금 전의 상황이 떠올라 잠시 움찔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의기투합하였다. 그러다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길천의 제안으로 넷은 시공을 초월해 모두 의형제의 결의를 맺게 되었고, 곧 형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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