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배까지 움켜쥐며 박장대소하던 비담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길천의 상태가 영 불안정한 것이 정말로 모두 죽여 입을 막겠다는 의지가 보였던 것이다. 비담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길천을 말렸다.
“혀, 형님? 그만한 일로 이리 화내실 것까지야...”
“뭐? 그만한 일? 네 눈엔 이게 보통일로 보이냐? 저것들이 나를 우습게 여겨도 유분수지 음란마귀에 색마까지 등장한 마당에 내가 참게 생겼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색귀, 색마인 거 알고 있지? 말리지 마. 오늘 다 깡그리 죽여 버릴 테니까.”
“아이, 그러면 계획이 어긋나잖아요. 세력을 규합하여 상제가 되시겠다는 당찬 포부는 어디다 던져버리시고 이리 흥분하시는 거예요? 그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이제 슬슬 상제로서의 위엄과 체통을 보이셔야죠. 저리 보는 눈도 많은데.”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거기서 열심히 나를 변호하고 감싸줘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크게 웃어? 전부 용서 못해. 크아악.”
“소제가 잘못했으니 그만 진정하세요. 그리고 여기서 몽땅 소멸시키면 뭐가 남아요? 형님의 화야 풀리겠지만 남는 게 없잖아요. 어차피 형님 아래서 만년 동안 구르실 분들인데 두고두고 화풀이 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더 남는 장사에요.”
“크흠. 만년 동안이라...알았다. 이제 진정되었으니 그만 놔.”
“진짜 진정되신 거 맞으시죠?”
“진정됐다니까. 네 말대로 앞으로 내 밑에서 만년동안 있을 녀석들이니 훗날을 기약해야지. 흐흐, 모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비담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으나 애써 무덤덤한 신색을 유지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 정도 배포와 아량을 겸비하신 형님은 역시 상제로서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참, 그나저나 천마와 검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쩌실 생각이세요?”
순간 나머지로 전락해버린 영체들이 긴장 속에 길천의 입을 주시하였다. 자신들의 운명이 길천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흐흐, 어차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영력의 절대량엔 변함이 없다. 인간계에 있을 때나 쪽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였지...가만...아니지, 꼭 그렇지만도 않지. 예전에도 절대고수의 수가 중요했으니 결국 마찬가지구나. 뭐 복잡하게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니까 그냥 하던 데로 하자. 야!! 천마랑 검제? 죽기 싫으면 얼른 옆으로 빠져라.
언제 맘 변해서 확 싸잡아 소멸시킬지 모르니까 얼른 얼른 알아서 옆으로 기어나가.”
‘형님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빠져나가세요. 가만히 그리 넋 놓고 계시다가 진짜 소멸되십니다.’
갑자기 길길이 날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힘을 개방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려했던 길천의 행동으로 인해 멍하게 있던 천마와 검제는, 다급하게 들려오는 전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슬금슬금 전장 밖으로 이동하였다.
만년지투가 벌어지고 있는 천계에서 힘은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아무런 군소리 없이 눈치껏 옆으로 빠진 것이다.
물론 천마와 검제 둘 모두 자존심이 무척 상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전 무림을 활보하던 때의 자신들이 아니듯 지금 이곳에 있는 도색성 길천도 예전에 몇 번 보았던 그가 아니었다. 명실상부 상제의 영력에 버금가는 아니 이미 앞질렀을지도 모르는 힘을 지닌 어마어마한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누군가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전세가 역전된 과거의 절대고수들을 바라보며 비담은 다시 한 번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씨알도 안 먹힐 다짐을 하였다. 누구보다 자신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비담이었기에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형님? 나중에 저분들도 상제랑 싸워야하니까 의식부터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 영력도 높아질 테고 형님에 대한 충성도도 올라가고요.”
“필요 없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다. 지들이 뭐 한 게 있다고 넙죽 공짜 영력을 나눠 주냐? 그리고 소멸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언감생심 영력까지 축내서야 말이 안 되지. 그건 됐으니 그만 신경 쓰고, 저것들이나 정리하자.”
길천은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비담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 한 후 그대로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담도 날카로워진 길천의 신경을 더 이상 긁지 않고 바로 뒤따라 몸을 날렷다.
하련은 방금 일어난 소란쯤이야 별거 아니란 듯 그저 묵묵히 영력으로 형성된 검을 들고 늘 해왔던 대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길천은 화풀이라도 하듯 지닌바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공중에 부채 하나를 띄웠다. 그렇게 형성된 거대한 부채는 남아 있던 영체들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지상을 향해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내리 꽂혔다.
콰콰쾅
큰 폭음과 함께 잘게 터져 나간 영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워낙 막강한 힘과 속도로 날아왔기에 대부분의 영체들은 구멍이 숭숭 뚫리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비담은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는 수많은 영체사이를 한 마리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어 휘저었다. 화류선법에 바탕을 둔 정교하고 화려한 초식들이 전장 한 복판을 수놓았는데 그동안 비담 역시 영력을 계속 쌓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듭되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체들 역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자신이 생성할 수 있는 최대치의 영력덩어리를 만들어 길천과 비담을 향해 쏘아 보냈다. 하지만 유려한 보법과 신법을 겸비한 둘에겐 콧방귀가 나올 정도로 한심하고 단순한 허점투성이 공격이었다.
갑자기 흥이 돋는지 길천은 길게 휘파람을 한차례 분 후 부채로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박투로 전환하여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비담 역시 길천의 행동에 자극받아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를 없앤 후 주먹을 힘껏 말아 쥔 채 타격으로 영체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파파파파박, 퍼퍼퍼퍼벅, 투투툭, 퍽퍽.
언제 그랬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신나게 뛰어다니는 둘을 보며 하련은 짧게 혀를 차면서도 이내 웃음 짓고 말았다.
‘쯔쯔,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래도 좋아. 그래서 더 좋아. 호호.’
하련 역시 휘두르던 칼을 살포시 없앤 후 으스러져라 주먹을 말아 쥐고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먹잇감을 물색하였다.
그렇게 세 명이 만들어낸 거친 풍랑에 영체들은 휘청거리는 조각배처럼 그저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하나 둘 뿌옇게 흐려지다 종래에는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한결 요란해진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우자 멍하니 구경하던 천마와 검제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우리도 저랬는데. 300년 전 온 천하를 발아래에 둔 채 강호가 좁다하며 온 사방을 누비고 다녔을 때가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눈 깜짝할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마지막 수장의 비명과 함께 장내는 말끔히 정리되었다. 길천과 비담, 하련은 스윽 한 바퀴 둘러본 후 개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채보다 이게 나은데요?”
“안 그래도 기분이 상당히 꿀꿀했는데 조금 풀리는구나.”
“호호, 역시 호쾌한 맛은 손맛이 제일이에요.”
어른 주먹 세 개는 들어갈 정도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천마와 검제. 자신들보다 월등히 높은 상위의 영체 수십을 순식간에 찜 쪄 먹은 세 괴물. 도대체 저것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토록 강하단 말인가.
짧은 품평을 뒤로 하고 길천은 휘적휘적 천마와 검제를 향해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명령조로 짧고 강렬하게 말했다.
“부럽냐? 그럼 꿇어.”
“대관절 갑자기 꿇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인가? 호오!! 말이 좀 짧다.”
“허, 허나 예전 동시대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동지로서...”
“지나간 과거야. 돌릴 수 있으면 돌리든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그리 우리를 홀대하고 막 대하는 것은 강호의 예법 상 크게 어긋나는 일 아닌가? 저기 어린친구들도 보고 있는데...”
“요란하고 실속도 없는 불필요한 겉치레지. 억울하면 힘을 키우든가. 그리고 방금 전까진 색귀 어쩌고 그러면서 날 냠냠 맛나게 씹었잖아? 그건 예법에 들어맞고? 아무튼 구차하게 긴 말 할 필요 없고, 우리랑 함께 만년 동안 천계를 노닐며 화끈하게 살고 싶거들랑 눈 딱 감고 무릎 한 번 꿇어. 그게 싫으면 소멸되면 되는 거고. 고상하게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데 짐 싸들고 다니며 말릴 생각 없으니까 어서 선택해. 꿇을래? 아님 뒈질래?”
“만 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 귀찮아 죽겠네. 확 쓸어버려? 기분 좋아서 좋게 말하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냐? 지금 이 상황 감이 안 와?”
‘어서 꿇으세요. 나중에 제가 차근차근 설명 드릴게요. 안 그러면 진짜 소멸되실 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니 무조건 꿇으세요, 어서요, 천마 어르신.’
비담의 다급한 전음이 천마의 고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천마는 영문도 모른 채 하는 수 없이 길천 앞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넌 왜 안 꿇어? 꼿꼿한 그 다리 내가 분질러주랴?”
길천의 시선이 이번엔 멀뚱멀뚱 서있는 검제를 향하였다.
“커흠, 무슨 말을 그리 험악하게 하나...하십니까. 꿇습니다. 꿇어요. 자, 보십시오, 벌써 꿇었지 않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검제의 두 무릎은 순식간에 땅에 닿아 있었다. 길천은 짐짓 험악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풀더니 두 사람의 머리에 차례로 짧은 빛을 쏘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