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54)

142화

간단한 의식이 끝난 후, 길천은 만년지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긴 이야기를 들은 하련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년지투라니...이곳에서 지낸 300년 동안 너무나 평화로워 그런 게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요.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그 녀석들이 저를 공격할 수 있었던 거군요.”

“그래, 내가 황금선도를 취한 순간 만년지투는 시작된 거란다. 아마도 많은 영체들이 당황하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모두들 적응하고 있을 게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세요. 황금선도의 영력을 모두 흡수하시다니 말이에요.”

“말 그대로 기연이었지. 여기 있는 담이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호호, 결국 아버지께 진짜 기연은 비 숙부님이셨네요.”

“그렇게 되나?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하하하.”

둘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담 역시 함께 웃었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은 예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이제 다시 움직이시죠, 형님.”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딸아이를 재회한 기쁨에 시간가는 줄 몰랐구나. 그래, 네 말대로 두 늙은 구렁이들 잡으러 그만 가보자.”

“네? 두 늙은 구렁이요?”

하련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반문했다.

“방금 말했듯이 세를 규합해야 화끈하게 상제랑 한판 붙을 수 있잖니. 그래서 천마랑 검제 녀석을 섭외하기로 하였단다.”

“아! 천마와 검제를 칭하셨던 거군요. 전 또 정말 구렁이를 잡으러 가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그 둘은 늙은 구렁이가 딱이지, 암 딱이야. 어서 가자.”

길천은 기분이 좋은 지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장 서 걸었다. 비담은 못 말리겠단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그 뒤를 쫓았고, 하련 역시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고 그 둘의 뒤를 따랐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버지에 든든한 숙부까지. 방금 전 존재의 소멸 위기까지 내몰렸던 악몽은 어느새 큰 행운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한 달 후.

“형님, 북쪽을 다 뒤졌는데도 안 보이네요?”

“뭐가 걱정이냐. 그럼 서쪽으로 내려가면 그 뿐. 가자.”

“후후, 걱정도 안 되세요?”

“엥? 갑자기 무슨 걱정?”

“동천왕도 소멸시키고, 동쪽과 북쪽을 돌며 이리 난장을 피우셨는데 상제가 언제 쫓아올 지 걱정도 안 되시냐고요?”

“까짓것 나타나면 붙는 거지.”

“오우! 자신감으로 충만하시네요. 긴장을 놓으면 위험하다 어쩌다 그러신 게 어저께 같았는데 말이죠.”

“너도 오면서 겪어보았잖아. 애들이 전부 힘도 못쓰고 비실비실 한 거. 그리고 그동안 돌며 모은 영력도 만만치 않고. 삼분지 일로 나누었는데도 말이지.”

“그렇긴 하네요. 저와 하련이 역시 많이 강해졌죠.”

“그게 다 잘나신 형님과 애비를 두어서 그런 거야. 푸하하하하!!”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럼 방향을 틀어 아래로 내려갑시다.”

“흠흠, 쑥스럽구먼. 그래 어서 서둘러 내려가자.”

‘하여튼 두 분 다 못 말린다니까. 호호.’

하련은 둘이 옥신각신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런 게 가족이리라.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

그렇게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슈슉, 펑펑. 슈슈슉 펑펑펑.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근거리에서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빛들이 난무하였다. 호기심이 동한 셋은 서둘러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셋은 치열하게 싸우는 두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30 대 30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똑같은 수로 나뉜 두 무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과 난무하는 빛의 정체가 바로 이 싸움 때문이었는데 근래 이동하며 본 것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싸움이었다.

“저 봐라, 저 봐. 저것들은 죽어서도 죽어라 싸우는구나. 쯧쯧, 30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변한 게 없어요.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같은 편에 서서 싸운다는 점이군.”

“어라, 아는 놈들이에요?”

“알지, 너무나 잘 아는 놈들이라 그게 문제지. 저기 길쭉하게 대나무처럼 생겨서 이리 덤벙 저리 덤벙 뛰어다니며 영력 날리는 놈은 검제고, 그 옆에서 눈을 있는 데로 부라리며 쉴 새 없이 떠드는 시커먼 놈이 천마 녀석이지.”

“네? 검제 어르신과 천마 어르신이요?”

“드디어 찾은 것 같구나. 후후, 저것들은 세월을 그리 쳐 먹고도 어째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흐흐흐,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암, 안 변하고말고. 그나저나 저것들 이대로 두었다간 누구하나 다칠 지도 모르니 그만 구경하고 내려가자.”

무엇이 즐거운지 입이 함지박만 해진 길천이 서둘러 전장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한 길천은 엄청난 영력을 담아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만!!!”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으로 인해 전장은 얼어붙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함 속에 실린 힘이 너무나 막강했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굳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얼떨떨하게 서있던 무리에서 퍼뜩 정신을 차린 수장들이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저희들의 투쟁을 막으시는 겁니까?”

“정당하게 이루어진 전투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만하라 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무림이든 천계든 힘이 있고 볼 일이야. 다짜고짜 반말하고 영력부터 날렸을 터인데 이리 고분고분 존대까지 해가며 물어오잖아. 뭐, 갑자기 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급한 볼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달라고. 야!!! 거기 뒤에 서있는 천마랑 검제? 나 알아보겠냐?”

보잘것없는 영력으로 인해 무리의 끝자락에 서있던 천마와 검제는 갑자기 자신들의 별호를 부르며 살갑게 물어오는 정체불명의 영체 때문에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너 아는 놈이냐? 기생오라비처럼 반들반들 생겨서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영 모르겠네.’

‘글쎄...나도 처음 보는 놈인데.’

둘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과거를 들춰보아도 저처럼 무지막지한 영력을 지닌 존재와 통성명했던 기억은 없었다.

“허어! 고작 300년 지났다고 그새 나를 새카맣게 잊어버리다니. 괘씸한 놈들.”

그런데 그 장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비담이 참다 참다가 그만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천외삼성이라면서요? 근데 왜 저 두 분이 형님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저 두 분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요? 정말 그 당시 사람들이 세 분을 합쳐 천외삼성이라 불렀다는 게 사실이에요?”

“허흠!!! 다, 당연하지. 우리 셋을 합쳐 천외삼성이라 불렀다니까. 아, 미치겠네. 이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정말 기억 안나? 이래도?”

길천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전신을 두른 황금갑주를 없애고,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손엔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를 쥔 채 특유의 걸음으로 전장 한 복판을 거닐었다. 간절한 눈빛을 가득 담아.

그때 검제와 천마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감탄사의 어감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아!!! 그 녀석이네. 부채 하나 달랑 들고 여자들 등쳐먹으며 돌아다녔던...가만, 별호가 뭐였더라...?”

“아!!! 나도 어렴풋이 생각나는구먼. 어디쯤에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그래, 항주에 머물 때 음란마귀가 활보한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했던 적이 있었지. 맞아, 맞아, 저 모습을 보니 또렷이 기억나는구먼. 그러게...별호가 뭐였더라? 무슨 색귀? 무슨 색마? ‘복숭아 도(桃)’ 자가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뭐, 뭐시라? 음란마귀? 무슨 색귀? 색마? 아!! 뒷목이야.”

“크하하하하하. 내 언젠가 형님 허풍이 들통날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게 좋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서 쪽팔리게 이게 무슨 봉변이에요. 그나저나 이거 살인멸구, 아니 살영멸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목격자가 이리 많으니. 푸하하하하.”

“야!! 이 새끼들아. 늬들 다 뒈지고 싶냐? 도색성. 엉? 도색성이라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별호는 길거리에 내던지고 꼭 그따위로 말하고 싶냐?”

“맞다! 도색성. 여자 등이나 치고 다니는 주제에 거창하게 색성(色聖)이라 칭하고 다니던 건방지고 음란한 놈.”

“그러네. 이제 생각났으이. 맞아, 그런 건방지고 음란한 녀석이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지. 그때 많이 봐줬었는데 말이야. 원래 별호에 ‘색’자 들어가는 놈들 치고 정상적인 놈이 하나도 없어서 손봐줄려 했는데 당시 여자들이 극구 말리고 호소하는 바람에 그냥 조용히 넘어갔더랬지. 이런 데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더 이상은 못 참아. 세력이고 나발이고 오늘 여기서 모두 끝장을 보자. 담이 너도 목격자니 조용히 사라져줘야겠다. 그리고 하련이는...조금만 고민을 더 해보자.”

길천의 영체주변으로 미증유의 거력이 용솟음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