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54)

141화

길천은 애가 타는 비담의 속을 모르는지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끊어질 듯 느릿느릿 말을 뱉었다.

“이 아이가...바로...내가 말했던......소중한 내 딸......하련이란다.”

말을 하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끝말은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매우 작았다.

“네? 누구시라고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랑하는 내 딸...하련이.”

“예!!! 형님의 딸이라고요? 그, 그럼 설마...300여 년 전 ‘검의 여제’로 불리셨던 북해빙궁의 초하련 궁주님?”

“이리 오렴, 하련아.”

“네, 아버지.”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둘을 향해 다가왔다. 급작스러운 부녀상봉이 얼떨떨했는지 그녀 역시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아직도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그녀의 눈부신 미모를 오히려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여기 멀대 같이 서서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는 친구는 이 못난 애비의 의제란다. 이름은 비담이고. 여긴 자네도 익히 들었던 내 딸 하련이.”

“소녀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비 숙부님.”

하련은 날아갈 듯 우아한 자세로 비담에게 절을 올렸다. 비담은 하늘같은 무림의 대선배를 향해 지극히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취하려다 그만 아연실색 당황하고 말았다.

“헙!!! 제게 이러시면 제, 제가...몸 둘 바를......이 일을 제가 어찌 감당하라고...형님? 형님!!! 제발 어떻게 좀...”

“아차차!!! 이곳에서 300년의 세월을 보냈더니 그만 시간에 대한 개념을 상실했구나. 어찌한다...”

생각할수록 복잡했기에 길천은 그만 끙 앓고 말았다.

‘내 색공과 무공 전부를 담이에게 전수했으나 엄연히 처음부터 사제지간의 연을 맺진 않았으니 같은 사문의 오누이처럼 서로 정답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렇다면 10여 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며 나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으니 당연히 숙부라 불러야하는데 그 역시 서로의 나이차를 생각하면 영 그림이 이상하고...반대로 담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 하련이는 배분 상 300여년이나 앞서 살았던 무림의 대선배란 말인데...아! 복잡해. 무슨 놈의 족보가 이리 꼬였담. 할 수 없지. 이럴 땐 정면 돌파가 최선책이니 부딪혀보자.’

“하련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이쪽으로 와 앉거라. 담이 너도 이쪽으로 와 앉고.”

길천의 부름에 비담과 하련은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길천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망설이다 이네 10여 년 전, 비담과 처음 만나게 된 부분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두 시진 후.

구구절절 이어지던 길천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휴우, 이렇게 된 거란다. 그래서 말인데 둘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어찌 정리했으면 좋겠느냐? 가감 없이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울기도 하며 장황한 이야기를 들은 하련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놨다.

“행적으로 미루어 두 분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맺고 계시네요. 이미 죽어 육신이 사라졌는데 인간 세상에서의 배분과 세월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소녀의 짧은 소견으론 제가 아버지를 대하듯 비 숙부님으로 모시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 하오나 형님? 이리 곱고 젊으신 따님에게 연배나 경험에서 한참이나 어리고 부족한 제가 어찌 숙부소리를 듣는단 말입니까?”

“듣고 보니 나 역시 하련이의 생각이 옳은 것 같구나. 만년지투가 지향하는바 역시 강자존을 통한 새로운 질서 확립과 위치 아니더냐.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던 세상이 바뀌었으니 과거의 일들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 하련이 말대로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처럼 의형제 간으로 지내고 그에 합당한 예를 받는 게 좋겠어.”

“두 분의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쩝, 그나저나 많이 아쉽네요. 이리 곱고 아리따운 분을 누님으로 부르며 따르고 싶었는데.”

소저나 누님으로 칭하고 싶었던 간절한 비담의 바람은 결국 자신이 숙부가 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300살이나 드신 귀여운(?) 질녀를 얻게 된 비담은 수많은 아쉬움들을 애써 가슴에 묻은 후 화제를 화류선으로 돌렸다.

“저, 저기 하련아? 아!! 어색해.”

“호호, 편하게 말씀하세요, 숙부님. 제게 뭐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큼큼,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인데... 북해빙궁의 염천에 꽂아져있던 형님의 화류선 말이다, 혹시 네가 한 일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 아버님의 화류선 말이군요. 네, 맞아요. 제가 그곳에다 꽂아 두었어요. 어머니가...아니 설후가 제게 걸었던 수법의 부작용으로 이지를 상실한 채 떠돌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잠깐 정신이 돌아왔었거든요. 그때 어렵사리 아버님의 유품을 구해 제가 얻었던 최후심득과 함께 그곳에 두었었지요.”

“그랬구나. 형님의 얘기를 듣고 그저 짐작만 했었는데...그런데 ‘설매풍류’라는 초식을 써야만 부채가 뽑히게끔 안배해 두었던데...?”

비담의 질문을 받은 하련의 시선이 점점 따스하게 물들더니 이내 길천을 향했다. 하련의 시선을 받은 길천 역시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 저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곤 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붉은 매화 밭. 그곳에서 추었던 그 춤을.

춤이 끝난 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아버지와 단 둘이 나누었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인 걸요.”

비담은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예전 자신이 북해빙궁에서 추측하였던 데로 초하련 궁주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짐을 덜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의형을 보며 비담은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형님이 마음의 짐 때문에 그동안 많이 괴로워하셨는데 정말 잘 됐어. 아, 나도 서희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부둥켜안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비담의 마음 한구석이 쓰디쓰게 아려왔다.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느냐?”

“무림인이라면 누군가의 내력에 대해 묻는 것이 큰 결례임을 알지만...저기 혹시 방금 비담 숙부님께서 사용하셨던 힘 있잖아요...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숙부님이 이곳 천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럼 저보다 영력이 약하실 텐데 어떻게 저를 쫓던 그놈들을 한 방에 날리셨는지 무척 궁금해서요.”

“하하하, 그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그리 조심스럽게 묻느냐. 그거 별로 어렵지 않다. 너 역시 할 수 있는 일이야.”

“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요?”

“너 역시 무림에서 활동하였으니 당연히 어렵지 않지. 영력도 생각하기 나름이니라. 그것을 예전의 내기라 생각하고 똑같이 운용하면 된단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나도 담이에게 듣기 전까진 생각조차 못해봤단다. 그런데 해보니 오히려 더 잘 되더구나. 영체를 예전의 육신이라 여기고, 영력을 내기라 생각하고 일주천 시켜보니 자연스럽게 흐르더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발상의 전환을 이루면 충분히 가능해.”

“믿기지가 않아요.”

“여기 확실한 증거가 둘씩이나 있지 않느냐. 그럴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하는 게 좋겠구나. 못 나눈 이야기들이야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어서 시작하자.”

“네. 해볼게요.”

하련의 얼굴엔 놀람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를 철썩 같이 믿었기에 곧바로 자세를 잡고 앉았다. 길천이 굳이 자세를 잡지 않아도 된다 말하려다 비담의 눈총에 급히 입을 닫았다.

두 시진 후.

하련의 영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기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몰아쳤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후아!!!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어째서 그동안 생각조차 못한 것인지.”

“후후후, 생각 못하는 게 당연하지. 이미 죽어 영체로 존재하기에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하하하, 졸지에 이상한 생각이나 하는 놈으로 전락해버렸네. 그래도 뭐 알을 깨고 나오려면 이리도 굴러보고, 저리도 굴러보고 해야지. 안 그런가? 아름다운 우리 질녀는 어떻게 생각해?”

“호호, 당연한 말씀을요. 숙부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세요.”

“하하하, 우린 뭔가 통하는군.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나저나 진심으로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숙부님. 이 모든 성취가 다 숙부님의 혜안 덕분이지요.”

“우리 예쁜 질녀는 고약한 아버지를 하나도 닮지 않았어. 그래서 더 좋아. 누구처럼 이상한 놈 취급도 안하고 말이지. 그런데 ‘혜안’이란 그 단어 차~암 어감도 좋고, 듣기도 좋구먼. 누군가랑은 생각하는 급이 달라, 암! 아주 다르고말고.”

“흠흠, 미안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하자.”

“흠흠, 형님도 어휘선택을 하실 때 신중을 기해서...”

“한 발만 더 나가면 부채구경 실컷 시켜주마.”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건 그렇고 다시 화기애애해졌으니 그 의식인가 뭔가 해야 되지 않아요? 그래야 하련이도 안전하고 영력도 흡수할 수 있고요.”

“이런...깜박 잊고 있었구나. 하련아? 이리로 와 무릎을 꿇고 앉으려무나.”

“의식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간단한 의식이니 끝나고 모두 설명해주마. 어서 앉으렴.”

“네, 아버지.”

하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길천은 비담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하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짧은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일었고, 나타남과 동시에 하련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