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한 달 후.
“끄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영체 하나가 희뿌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영 싱겁군. 가만있어보자. 이 녀석이 몇 번째더라...”
“스물 한 번째죠.”
“벌써 그렇게 됐나? 그나저나 녀석들도 이제 슬슬 뭉쳐 다니는구나. 처음엔 나홀로 다니는 녀석들이 많았는데 말이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으니 형님 말씀대로 나름 살 궁리를 한 거겠죠. 그런데 어쩌죠? 동쪽 끝에 다다랐는데도 천마 어르신과 검제 어르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으니.”
“흐흐,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무에 걱정이냐. 막다른 길에 다다랐으니 방향을 틀어 찾아보면 되지. 그럼 어디로 가볼까? 북쪽? 아니면 남쪽?”
“음...이럴 땐 부채점이 최고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어디보자.”
비담은 자신의 영력으로 만들어낸 부채를 쫙 펼친 후 바닥에 대고 세웠다. 그러더니 그대로 손을 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부채는 비담의 왼쪽 방향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저쪽이면...북쪽이네요. 가시죠.”
“후후후, 예전 버릇이 또 도졌구나. 그냥 북쪽으로 가고 싶다하면 될 것을 뭐 하러 그런 수고로움을 사서 하는지. 영력으로 만들어낸 부채니 당연히 네 의지를 따를 것 아니더냐?”
“그냥 재미죠. 안 가실 거예요?”
“간다, 가. 인석아.”
툴툴 웃던 길천이 이내 비담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그들의 눈앞에 무언가에 급히 쫓기듯 달려오는 영체 하나가 들어왔다. 길천과 비담은 상황파악을 위해 잠시 제자리에 멈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영체를 바라보았다.
“달려오는 모양새로 보아 무언가에 쫓기는 모양인데...어, 어라? 여인인데요?”
“여인? 어디보자...여인 맞구나. 담아?”
“네?”
“뭐해? 안 튀어나가고?”
“엥? 제가요? 힘이 남아도는 건 형님이시잖아요.”
“야 임마! 어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들어. 흐흐, 만에 하나 네 녀석이 정 힘에 부치면 지원사격일랑 든든하게 해줄 터이니 걱정 말고 튀어나가렴. 도와 달라 가슴 절절하게 외치는 여인의 음성이 안 들리느냐?”
“그저 치마만 두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우리들에게 여인이란 보배 같은 존재니라. 비록 죽었을지언정 끝까지 꽃을 보호하는 사명을 등한시해서는...”
“그만 좀 하세요. 간다잖아요. 힘이 철철 넘치는 소제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늙으신 몸 잘 보존하시면서 천천히 따라오시구랴. 그럼 소제는 지엄하신 차기 옥황상제의 황명을 수행하기위해 이만 갑니다요. 헤헤헤.”
“저, 저놈이...”
장난스레 웃던 비담의 신형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비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천은 눈에 쌍심지를 켰으나 이내 피식 웃고는 그 뒤를 급히 쫓았다.
서로 마주 보며 달려오는 상황이었기에 비담과 여인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졌다.
그렇게 서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여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마도 비담을 자신의 뒤를 쫓는 무리와 한 패라 여긴 듯했다.
그렇게 여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둘의 거리는 더욱 좁혀져 사라질 찰나. 여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비담을 향해 영력 덩어리를 쏘아 보냈다.
슈우욱
비담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영력 덩어리가 확실히 보였지만 짐짓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 유연한 동작으로 피해버렸다. 그런 다음 여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서로가 교차되어 지나친 순간.
‘헉!!! 너무 예쁘잖아. 선녀인가?’
그 짧은 순간 여인의 전신을 훑어본 비담의 평가였다. 비담은 서희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 확신했던 지난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어.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저놈들인가?’
비담의 눈에 바람처럼 달려오는 영체 셋이 들어왔다. 비담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세 영체를 향해 다짜고짜 부채를 날렸다. 영력으로 형성된 부채의 수가 물경 수백에 달하자 정신없이 여인을 쫓아오던 영체들은 그만 아연실색 당황하고 말았다.
슈슈슉 핑핑핑 슈슈슉
투두두두두두두둑 펑펑펑 퍼엉 펑펑 퍼버버버 펑펑가죽북 터지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 영체는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세 영체를 뚫고 지나간 부채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끝마치고 사라질 무렵 세 영체 역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상황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비담은 손을 탁탁 턴 후 여인이 멍하게 서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아직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인에게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소저,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엥?”
비담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긴장으로 인한 떨림으로 치부하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불현듯 여인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의 시선이 고정된 곳엔 길천이 서있는 것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길천 역시 벼락에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본 채 떨고만 있는 두 사람.
“뭐, 뭐지? 이 상황은...”
비담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둘의 모습이 너무나 비장해서 차마 끼어들 엄두가 나진 않았다.
그렇게 속으로 삭히며 끙끙 앓고 있는 비담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드디어 잔잔하던 대치 상황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바로 여인이 자석에 끌리듯 한 발 한 발 길천을 향해 다가갔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놀라운 건 길천 역시 여인의 행동에 전염이라도 된 듯 똑같이 한 발 한 발 다가선다는 점이었다.
‘아주 묘한 분위기야. 이거 무언가 곧 터질 것 같은데...으악!!! 뭐, 뭐야?’
상황을 지켜보던 비담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되었다. 왜냐하면 조심스럽게 다가서던 둘이 어느 순간 질주를 하는가 싶더니 서로를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둘의 포옹은 일정거리를 두고 있는 비담에게 전달될 정도로 가슴 절절했다.
‘뭐, 뭐야? 형님의 정인인가? 가만...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서로 교류가 없다 하셨지. 그렇다면 분명 인간 세상에 계셨을 때 사귀셨단 말인데...어째서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 형님 성격상 저토록 고운 처자와 사귀었으면 으레 자랑삼아 구구절절 떠드셨을 텐데...가슴 절절한 걸 보면 보통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아!!! 답답해!!! 궁금해 미치겠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비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쭈뼛쭈뼛 둘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하!!! 형님? 누구신데 이리 눈물겨운 상봉을 하시는 거예요? 저에게도 소개 좀 시켜주시죠?”
“형님? 제 목소리가 안 들리시나요? 여보세요? 아!!! 정말 미치겠네. 그만 좀 하시고 이 상황 좀 말씀해 달라니까요. 제가 웬만하면 참겠는데 무려 한 식경(30분)이나 지났다고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냐고요?”
자신의 질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무려 한 식경 동안이나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두 남녀 때문에 비담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말았다. 그제야 둘에게서 비담이 기대하던 반응이 나타났다.
“험험, 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그래, 뭐라고?”
“휴우, 이 고우신 소저가 누구시냐고요?”
“아!!! 큰 충격에 그만 정신을 놓았구나. 암!!! 당연히 너에게 소개시켜 줘야지. 이 아이가 바로...”
“바로...?”
비담은 자신이 기대했던 대답을 드디어 들을 수 있겠다는 흥분에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길천의 입만 뚫어져라 응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