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길천은 자신의 영력으로 생성된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다 한 곳을 가리켰다. 비담이 부채 끝을 쫓아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조그마한 점으로 보이던 물체는 어느새 또렷한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이내 둘 앞에 멈추어 섰다.
비담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길천에게 답을 구했다. 하지만 길천은 대답 대신 특유의 느물느물한 음성으로 새로 등장한 흑의영체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 정도로 인물이 꽤나 잘나긴 했죠. 헌데 남자들에게도 이리 인기가 많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 하루 벌써 두 번씩이나 뵙는군요, 동천왕 나으리.”
새로이 등장한 흑의인의 정체는 동천왕 패도였다. 패도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다그치듯 따져 물었다.
“시답잖은 소린 집어 치우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방금 뭐였나?”
“당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머리, 꼬리 다 잘라내고 윽박지르면 제가 어찌 대답을 합니까? 도대체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폭발 말일세. 폭발.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 폭발의 정체가 궁금하셨던 거군요. 뭐 보시다시피 작은 소란이 일어났었죠.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는가? 이곳엔 황금복숭아나무가 있거늘. 만에 하나 나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라면 자넨 무사하지 못할 걸세. 아니지, 내 직접 나무의 상태를 봐야겠으니 저리 비키게.”
동천왕 패도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길천을 거칠게 밀어낸 후 곧장 나무의 상태를 살피러갔다. 하지만 나무 앞에 선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길천을 거칠게 쏘아보았다.
“이...이...이게 어찌된 일인가?”
“뭐가 말입니까?”
“네 이놈!!! 어째서 나뭇잎이 모두 사라지고, 가지마저 앙상하게 말랐더란 말이냐. 도대체 어째서!!!”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맡은 바 소임을 다했으니 잎은 시들어 떨어지고, 가지는 말라비틀어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무어라? 맡은 바 소임?”
“황금복숭아나무의 소임은 황금선도를 맺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한 셈이죠.”
“황금선도가 열렸단 말이더냐?”
“네. 열렸죠.”
“그 선도, 지금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죠. 헤헤, 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저도 모르게 그만.”
길천은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들기며 웃었다. 동천왕 패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길천의 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불같은 노성을 지르며 전신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네 이놈!!! 지금 본 왕을 희롱하는 것이냐? 감히 일개 신선 따위가 장난을 칠 정도로 내가 그리 만만하고 우습게 보였단 말이더냐. 어서 황금선도를 내놓지 못할까?”
“정말 저도 모르게 꿀꺽 했다니까요. 안 믿으시면 저야 어쩔 수 없고요.”
길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두 손을 활짝 펴 보였다. 동천왕 패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황금선도 때문에 애써 분노를 삭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네가 탐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물건이 아니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 두고 어서 황금선도를 내 놓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마지막 경고이니 허투루 듣지 말고 어서 내 놓아라.”
동천왕 패도는 무력시위를 하듯 영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동천왕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아마도 선도의 영력을 흡수하기 전의 길천이었다면 그 영력을 감당하기조차 버거웠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애들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
“무식하게 힘으로 윽박지르면 ‘아이고, 나리. 제가 보물에 눈이 멀어 헛된 꿈을 꾸었나이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여기 황금선도가 있으니 어서 가져가십시오.’ 이럴 줄 알았냐? 하아!!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줘도 귓구멍이 막혔으니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 그놈의 꽉 막힌 귓구멍 내가 속 시원히 뚫어주마.”
길천은 전신의 영력을 한 점으로 끌어 모아 그대로 동천왕 패도의 미간을 향해 쏘아 보냈다. 패도는 자신의 영력을 뚫고 쏜살같이 날아드는 엄청난 기운에 그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피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자신이 바닥을 뒹굴었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패도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길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이내 수많은 의혹들로 가득 차올랐다.
“바, 방금 뭐였느냐? 도,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계속 말했는데 그동안 뭘 들은겨? 내가 선도 먹었다고 했냐, 안 했냐?”
“정녕 그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냐. 허, 허나 감히 네 놈 따위가 다스릴 수 있는 기운이 아니거늘.”
“보고도 못 믿네. 그 기운을 다스렸으니까 왕씩이나 하는 네가 바닥을 구르는 거 아니겠어. 얼떨떨해서 그런 거야, 아님 감이 없는 거야?”
“그렇다면 어찌해서 선도를 먹은 것이냐? 분명 저 녀석의 영체를 빼돌리는 조건으로 상제와 약조를 하지 않았더냐? 네 녀석에게 신의 따윈 중요하지 않은 것이냐?”
“후후, 약조를 깬 것은 미안한데 엄밀하게 따지면 먼저 거짓말한 쪽은 상제 그 영감이야. 너도 아는지 모르겠다만 보시다시피 황금선도는 능력만 되면 아무나 먹어도 되는 거거든. 그리고 솔직히 내 구역에서 자란 나무니까 우선권 역시 나에게 있는 건데 먹으면 존재가 소멸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며 잔뜩 겁을 주고는 열매가 열리면 알아서 가져다 바치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협상을 하려거든 투명하게 모든 것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해야지 비겁하게 뒤에서 꼼수나 부리고. 뭐, 내 아우의 영혼을 데려와준 것은 고마운 일인데 영감 역시 비밀을 잔뜩 숨긴 채 내 보물을 강탈하려고 했으니 서로 비긴 것으로 하자고. 불만 없지?”
“네 이놈!! 보자보자 하니 방자하기가 끝이 없구나. 감히 상제께 그런 망발을 늘어놓다니.”
“휴우!! 이유도 모르고 뒈지면 억울할까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주었더니 남의 속도 모르고 방방 뛰는 꼬락서니라니. 아무튼 내 호의는 여기까지니 그만 사라져줘야겠다. 잘 가라! 동천왕.”
길천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이 지닌 모든 영력을 한 점으로 집중시켰다. 동천왕은 어마어마한 영력이 길천 주위로 몰려들자 그만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고 말았다.
“자, 잠깐! 감히 신선 주제에 상제를 능멸한 것으로도 부족해 천계의 지엄한 법도까지 어길 셈이더냐? 부여된 권능을 이용해 다른 신들을 핍박하거나 서로의 권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는 지고한 율법이 존재하거늘 어찌 본 왕을...”
“내가 황금선도 먹었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그럼 만년지투 시작된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너 뒈져도 나한테 뭐라 할 존재나 율법 따위 없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네놈이 어찌 그 사실을...”
“그것까지 대답해주긴 귀찮으니 알아서 생각하도록. 그럼 이제 새로운 질서를 위한 첫 번째 희생양을 제단 위에 올려볼까.”
길천의 영체 주변으로 엄청난 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부채가 생성되어 동천왕 패도를 향해 폭사되었다.
퍼퍼퍼퍼퍼벅
영력으로 형성된 수백의 부채가 동천왕의 영체를 뚫고 지나가며 요란한 폭죽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말마의 비명.
“끄아악!!!”
동천왕 패도의 영체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신기루처럼 서서히 증발하듯 사라졌다.
“흐음, 이거 장난이 아니로구나.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을 이리 손쉽게 할 수 있다니.”
“형님? 이, 이게 말씀하셨던 그 영력인가요?”
“응? 아차차!! 그렇구나. 만년지투가 시작되어 동천왕을 소멸시켰으니 그 영력이 고스란히 흡수되었지. 후후후, 어떠냐? 쓸 만하냐?”
“네? 고작 쓸 만하다고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힘은 난생 처음인데요. 대체 황금선도의 영력이 어느 정도기에...”
“상제가 되려면 이만한 힘은 가져야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그 영력은 절반에 불과해. 너와 내가 동시에 나눠가졌으니.”
“아무튼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 형님은 동천왕이 찾아올 걸 이미 아셨던 건가요? 분명 제물 어쩌며 운운하셨잖아요.”
“당연히 찾아올 거라 짐작했지. 너도 예상했듯이 상제는 최측근인 동천왕에게만 황금선도의 비밀을 말했을 거야. 나무가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 나를 찾아왔던 것도 그 녀석이었고, 상제와 협상을 할 때도 그 녀석만 옆에 있었고, 너의 영체를 내게 데려다 준 이도 그 녀석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큰 폭음이 들렸을 때 무슨 변고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당연히 그 녀석이 달려오겠지.”
“그래서 그리 서두르지 않으셨던 거군요. 전 황금선도를 취하자마자 상제의 눈을 피해 이곳을 떠날 거라 생각했거든요.”
“상제의 오른팔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리 허투루 날릴 수야 없지. 더불어 너와 나의 영력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 유추해볼 수도 있었지.”
“우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그 왕인지 뭔지 봐서는 상제 역시 대단한 힘을 지니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흐흐흐, 나도 동천왕과 겨뤄보니 어느 정도 확신이 드는구나. 허나 방심은 금물. 대충 가늠한 것이니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동천왕이 워낙 창촐 간에 당한 것이라 제 힘을 다 사용하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을 거야.”
“그렇죠. 강호에서도 긴장을 놓는 순간 ‘빡’ 하고 뒤통수 맞잖아요. 조심 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럼 이제 천마 어르신과 검제 어르신을 만나러 가면 되나요? 그런데 그 분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계세요?”
“당연히 모르지. 서로 교류가 없는 천계의 특성상 전혀 알 수가 없지.”
“휴우, 그럼 부지런히 발품 팔며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느 쪽으로 갈까요?”
“등잔 밑이 어두운 법. 동천왕을 제거했으니 동쪽부터 뒤지는 게 좋을 듯싶구나.”
“신 비담, 지엄하신 황명 받잡겠나이다. 하하하!!!”
“짐은 자네와 같은 만고의 충신이 곁에 있어 참으로 든든하구나. 앞으로도 변함없이 짐의 곁을 지켜주기 바라네. 그럼 출발해볼까? 푸하하하!!!”
둘은 시답잖은(?) 말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박장대소하였다. 그리곤 이내 동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