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제 15 장 만년지투(萬年之鬪)
한 시진 후.
길천의 영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지며 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 기운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순차적으로 집어삼키며 그 세를 불려나갔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일렁이는 기의 파도.
그러던 어느 순간.
무섭게 몰아치던 기의 폭풍이 회오리처럼 길천의 영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길천의 감겼던 두 눈이 떠졌다.
번쩍
섬광처럼 번뜩이는 눈빛. 하지만 그 빛은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고, 어느새 덤덤한 신색을 유지한 길천의 영체만이 오롯이 존재했다.
꿀꺽
비담은 자신이 영체로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자각하지 못한 채 예전처럼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위기로 보면 성공한 것 같은데...어, 어떠세요 형님.”
“후우, 이제야 깨닫다니. 내 자신이 오늘처럼 한심스러울 수가 없구나.”
성패여부를 묻는 비담의 질문에 길천은 긴 한 숨과 함께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이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비담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담이 네가 했던 예상은...완벽할 정도로 정확했다. 성공 아니 이만하면 대성공이다.
그나저나 무림의 칼밥을 먹었던 세월이 적지 않거늘 어찌 이런 기본적인 생각조차 못한 것인지. 이번 기회에 단단하게 굳어진 사고방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체감했구나. 정말 네가 조언해주지 않았다면 이런 발상의 전환은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고맙다.
”
“헤헤, 성공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행여 제 예상이 빗나가 형님께 해를 끼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거든요.”
“내가 선택한 일이니 행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내 자신이 감수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널 원망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았어.”
“그런 뜻은 아닌데...아무튼 성공하셨다니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나저나 효과는 어떤가요?”
“후후후, 비교 자체가 안 되는구나. 영력의 절대량은 변함없는데 힘을 사용하기 위한 영력의 수발이 자유로워 훨씬 강해진 느낌이야. 아니 실제로 강해진 것이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육신이 가졌던 제약이 영체엔 없어 주화입마라는 현상 자체가 없어. 이건 뭐 길을 인도해주니 거리낌 없이 알아서 쭉쭉 달리는구나.”
“그렇군요. 무림의 고수들 역시 내공을 이용해 일반인들은 감히 엄두조차 못내는 일들을 손쉽게 하잖아요. 역시 혈도와 기경팔맥이 존재한다 여기면 되는 거였어요. 그럼 이제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하실 수 있겠네요?”
“충분히 가능하다. 고정관념이란 틀에 얽매였던 사고를 확장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가능해 보여. 지금의 상태라면 만 년이 아니라 백 만년의 영력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겠어.”
“그 정도에요?”
“영체는 어떠한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릇 자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러니 끝도 없이 담아도 탈이 나지 않을 게야. 이번엔 내가 장담하마.”
“하기야 가늠할 수 없이 너무 크면 없다 여길 수도 있겠네요. 영체는 그게 가능하고요. 아무것도 없으니 탈이 날 수가 없겠죠.”
“이 짜릿한 기분. 나만 느껴선 안 되겠지. 그러니 너도 어서 시작하거라. 내가 옆에서 지켜보마.”
“그럼 소제도 시작하겠습니다.”
비담은 흥분을 가라앉힌 채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가부좌를 튼 비담을 보며 길천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담아. 굳이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된다.”
“네? 아!!! 이거 제가 형님께 한 방 먹었네요. 구구절절 떠들던 제 입이 부끄럽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비담은 가부좌를 틀려던 자신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찬 후, 그대로 선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곤 길천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며 영력의 흐름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 후.
비담의 몸에서도 길천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눈을 떴을 때 섬광 대신 부드러운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이었다.
“휴우~ 형님 말씀대로 확연히 다르네요.”
“그렇지? 휴우, 이 좋은 걸 놔두고 300년 동안 뭐 했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젠 열매가 열리길 기다리면 되겠구나.”
“그래야죠. 언제 열릴지 모르니 진득하게 나무 아래서 기다려야죠.”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테고. 그건 그렇고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한 다음에는 무얼 하면 좋을까? 만년지투가 열릴 테니 바로 상제랑 한 판 진검승부를 펼칠까?”
“조금 이르지 않아요? 상제 옆에 왕들이며 문신, 무신들이 즐비하다면서요.”
“그런가? 그럼 나 역시 세를 규합해야 되겠구나. 그래야 상제랑 붙었을 때 밀리지 않을 테고.”
“그게 좋죠. 아무리 형님이 황금선도의 영력을 흡수했다고 하나 상제의 영력이 어느 정도 인지 붙어보기 전까지는 가늠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각 왕과 문신, 무신들은 각자의 구역이 있음에도 상제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한다면서요. 그러니 형님과 저 단 둘이 움직이기엔 부담스럽고 위험해요.”
“그럼 어떤 녀석들을 끌어 모은다?”
“당연히 무림에 적을 두었던 신선들이나 영체를 섭외해야죠.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가 깨달은 방법을 전수한다면 큰 힘이 될 거예요. 우선 자연스럽게 형님의 힘을 과시한 후, 더불어 획기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면 쉽게 회유될 겁니다.”
“옳거니. 그럼 되겠구나. 흐흐흐, 그렇다면 우선 천마랑 검제 녀석부터 찾아가 봐야겠군.”
“후후, 맺힌 게 많으셨나 보네요.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하지만 형님도 알다시피 천마 어르신은 서희의 10대조 할아버님이시니 소제를 봐서라도 함부로 막 대하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크흠! 야 임마. 같이 칼밥 먹던 무림의 동료였는데 누군 어르신이고, 누군 형님이냐? 이거 아무래도 호칭부터 손봐야겠는데.”
“에이, 그 문젠 예전에 형님, 동생하기로 이미 끝났잖아요. 그리고 막말로 어르신 소리 듣는 것보단 형님 소리 들으시는 게 더 젊어 보이고 좋잖아요. 안 그래요? 고리타분하게 어르신 소리 꼭 듣고 싶으세요? 뭐 못할 것도 없지만 말이에요.”
“그, 그런가? 아니다. 그냥 형님이라 불러라. 듣고 보니 더 젊어보여서 좋다.”
“그러게 왜 꼭 긁어 부스럼을 만드세요. 아무튼 한 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니까 앞으론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천마 어르신 이야기가 나오니 잠시 잊고 있었던 서희가 다시 생각나네요. 그녀의 영혼은 편히 잘 지내고 있으려나...”
비담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잘 지내고 있겠지. 아니 잘 지낼 거라 믿는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 만년지투!!!”
“엥? 갑자기 왜 그러느냐?”
“형님, 만년지투요 만년지투. 모두의 영역이 허물어지면 서로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럼 서희 역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죠? 가능하죠?”
“휴우, 나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생각해보았다. 허나 서희의 경지로 유추해 보았을 때 우화등선 했으리라 장담할 수 없더구나. 그렇다면 아마도 염부로 끌려가 이미 망각의 샘을 마셨을 터이니 행여 만나더라도 너를 알아보지 못할 공산이 크다.
내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겠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거라.”
“그, 그럴까요? 그렇군요.”
비담의 어깨가 축 쳐졌다. 안쓰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천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하지만 너무 낙담하지도 말거라. 우리가 황금선도를 얻게 되는 것처럼 기연이란 예기치 않게 조우할 수 있으니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힘이 있지 않느냐? 만에 하나 서희의 영혼을 만난다면 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올 것이니 이 형님만 믿어라. 알겠지?”
“네, 형님. 고맙습니다.”
“아니다. 여러모로 내가 더 고맙지.”
비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길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