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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5/154)

135화

“아! 그래서 만년지투 인지 뭔지가 열리는군요. 그런데 그게 왜 화끈하다는 거예요?”

“말 그대로 투쟁이다. 먹고 먹히는 싸움. 강한 존재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소멸시키고 그 힘을 흡수하여 더욱 강하게 태어나는 것이지. 한마디로 천계의 질서가 새로이 정립되는 것이야. 물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평상시엔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년지투가 벌어지는 기간엔 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일종의 청소 및 정리정돈인 셈이지.”

“흐음, 그거 보기보다 무섭네요. 그럼 그렇게 정립된 질서는 또다시 만년동안 유지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물론 내가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300년 밖에 되지 않아 장담할 순 없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잘 유지되더구나.”

“그럼 형님 말씀대로라면 영력이 약한 존재는 무조건 소멸될 처지네요.”

“자연에 존재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과 같은 이치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지. 허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 아니더냐? 너 역시 무림의 생리를 잘 알 터.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지.”

“방법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후후, 천하제일고수도 눈먼 칼에 뒈질 수 있듯 떼로 덤비는 데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약한 존재들은 나름 자신들의 세를 구축해 자신을 보호하면 된다. 줄을 잘 서서 똘똘 뭉치면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소멸 대신 얻는 성과는 당연히 미미하겠죠?”

“아무래도 얻은 영력을 나누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후후, 원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큰 과실을 얻는 법. 그래서 아마도 두 부류로 나눠질 듯싶구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을 걸어보는 영체와 그저 소멸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무리들로.”

“그럼 형님은 어느 쪽이세요?”

“나야 당연히 후자지.”

길천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비담은 어깨까지 당당히 편 채 말하는 길천으로 인해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 도색성 어쩌면서 강호를 주름잡았던 패기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몸을 사린다는 말씀을 그리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히 하세요? 조금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끄럽긴. 전혀. 그리고 너도 생각을 해봐라. 자그마치 만년이다.

상제는 둘째 치고 하다못해 천 년 전에 들어온 영체들도 수두룩한 곳이 이곳이야. 그런데 고작 300년 밖에 안 된 햇병아리가 기침소리나 낼 수 있겠냐? 하하, 내가 아무리 설쳐보았자 그놈들 입장에선 하품밖에 안 나와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쳐부수는 게 빠를 거다.”

“에이, 그래도 무림에서 방귀 꽤나 뀌었던 형님과 전데...가만, 만년이라 하셨죠? 그럼 만년 전에 이곳에 들어온 영체는 무공의 무자도 전혀 모른다는 뜻 아닌가요? 내공 역시 모를 테고...”

“어, 어라? 듣고 보니 네 말이 맞구나. 무공의 탄생이야 아무리 길게 잡아도 고작 2천년 정도일 테니 나머지 영체들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더불어 내공심법과 초식의 정교화, 다양한 무공이론 발전과 역사는 길게 잡아야 수백 년이니 그 수는 더 줄어들 테고.”

“거 봐요. 그럼 형님도 모험을 걸어볼 수 있잖아요. 계란이 바위보다 단단하면 금세 부술 수 있다니까요.”

“후우,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야. 이곳에서 힘의 우열을 가늠하는 것은 지닌바 영력이다. 무림에 머물 때처럼 내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경천동지할 내공심법이나 정교한 초식 역시 이곳에선 하등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야.”

“하아, 답답하시긴. 제발 고정관념 좀 버립시다. 거 영력이란 게 힘의 근원 맞죠?”

“그, 그렇지.”

“그럼 육신에 내공이 돌아 내가고수로써의 위용을 보이는 거랑 영체에 영력인지 뭔지가 도는 것이랑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요?”

“허나 영체엔 혈도가 없지 않느냐?”

“혈도가 무슨 필요 있어요. 그냥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요. 없으면 임의로 영체에 만들면 되는 거고. 안 그래요?”

“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기운인데 실체화된 내공의 기와 같겠느냐?”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연구한답시고 사방천지를 쫓겨 다닌 우리 귀문은 뭐가 됩니까? 어디 귀신이 눈에 보여서 연구했나요? 그냥 가설을 바탕으로 연구하다 보니 상단전이란 것도 열게 되었고, 그러다 형님과 같은 원영신도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닙니까. 어디 제 말이 틀려요?”

“음, 구구절절 네 말이 맞구나. 그럼 영력을 내공처럼 여기고 제어해보란 말이지?”

“그렇죠.”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괜히 섣부른 판단으로 실행에 옮겼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그마치 만년의 영력을 얻는 일이잖아요. 그만한 모험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강호의 숱한 기인이사들도 천하제일고수가 되겠다며 기연과 영약에 목숨을 거는데 이미 죽은 마당에 뭐가 두려워 영혼을 사리시는 거예요?”

“하지만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거랑 그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느냐?”

“만년에 한번 찾아오는 기회인데 그냥 남 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막무가내로 해보자는 뜻은 아니에요.”

“막무가내가 아니라고?”

“그럼요. 가끔씩 제가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어서 문제지만 형님도 알다시피 아주 생각 없이 행동하진 않잖아요. 당연히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지요. 그리고 아주 신빙성 높은 정황증거들도 여럿 있고요. 물론 가설이긴 하지만 저 촉 되게 좋다는 것 형님도 인정하시죠?”

“신빙성 있는 정황증거들?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답답해 미칠 지경이니 어서 말해봐. 어서.”

“후후, 존재의 소멸이네 어쩌네 하면서 몸 사리시더니 급 관심이 가는 모양이네요. 그전에 제 가설과 정황증거들을 확실히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우선 만년지투가 곧 열리나요? 확실한가요? 만년에 한 번 열리는 투쟁이라면서 이곳에 300년 밖에 머물지 않은 형님이 장담하실 수 있나요?”

“만년지투는 곧 열린다. 그건 확실히 장담한다.”

길천은 단호한 어조로 확신하듯 답했다. 길천의 대답을 들은 비담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맴돌았지만 애써 그것을 감춘 비담이 재차 질문을 하였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죠?”

길천은 대답대신 공중에 작은 영상 하나를 띄웠다. 그 영상엔 기하학적인 수많은 문양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공간을 수놓았다.

“이, 이것들은 뭔가요?”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신성한 문자니라. 물론 너는 해독할 수 없을 터이니 간단히 설명하마. 지금 띄운 영상은 인간계에 존재하는 종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고로 네가 지금 바라보는 이것은 일종의 책인 셈이지. 제목은 ‘천생지사’로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수많은 세계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책을 얻었던 과정을 설명하자면 한편의 대하역사소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짜릿하고 박진감 넘치지만 시간 관계상 그것은 생략하도록 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주마.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책에 적힌 중요한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바로 만년지투와 황금선도에 얽힌 이야기이다. 내가 만년지투에 대해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책속에 적힌 내용 때문이지.

아무튼 짧게 요점만 다시 간추리자면 만년지투가 열림을 예고하는 증좌가 바로 황금복숭아나무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문자가 신성해 보이지는 않지만 형님 말씀이니 당연히 믿어야죠. 그럼 황금나무가 나타난 것을 바탕으로 만년지투가 열린다 확신하신 거네요?”

“그렇단다. 언제 열매가 맺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황금나무의 출현은 만년지투의 시작을 알리는 준비신호와도 같단다.”

“그렇군요. 그럼 만년지투에 대해 형님께서 그리 소상히 알고 계신 연유도 그 책 때문이었군요?”

“당연하지. 이제 갓 300년 묵은 햇병아리 신선이 무슨 수로 만년에 얽힌 천계의 비사를 알 수 있었겠냐? 떡하니 내 구역에 나타난 황금나무의 정체에 대해 상제 그 양반이 친절히 설명해줄 성질의 문제도 아니고, 당연히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심정으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내 노고와 뛰어난 머리의 결과물이지.”

“두말하면 입 아프실 테니 자화자찬은 거기까지만 하시고. 그럼 황금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면 그때부터 만년지투가 시작되는 건가요?”

“책에는 그리 적혀있더구나. ‘황금선도가 열림과 동시에 만년 동안 억눌렸던 투쟁의 장이 열릴지니, 그로인해 구분 지어졌던 서로의 영역 또한 사라지며 새로운 질서에 의해 재편되리라’ 라고.”

“음,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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