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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133/154)

133화

바람처럼 사라졌던 동천왕 패도가 다시 나타난 곳은 커다란 황금 복숭아나무 아래였다. 패도는 나타남과 동시에 옆에 끼고 있던 희미한 영혼 하나를 나무 아래에 내려놓으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여기 있네. 자네가 부탁했던 그 영혼.”

패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무의 한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영의 정체는 길천이었다.

“후후, 황금선도(黃金仙桃)가 대단하긴 하네요. 어려운 제 부탁을 이리 수월하게 들어주실 줄이야.”

“의뭉 떨지 말게. 그 선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잖은가. 그러니 관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그리고 열매가 열리면 지체 없이 상제께 진상하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되네.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상제의 능력이 아니고선 황금선도의 영력을 감당할 수 없음도 이미 알고 있겠지?”

“헤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만 믿고 기다리십시오.”

“알았네. 그럼 자네만 믿고 가겠네.”

“멀리 안 나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길천은 거듭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배웅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다시 든 길천의 얼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악한 미소가 한가득 이었다.

“후후, 늙어빠진 요물들. 만년 동안 해쳐먹었으면 됐지...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게 더 수월하겠구나. 그나저나 정신 좀 차려보아라. 응? 쯧쯧, 영체 역시 엉망이구나.”

길천은 고소를 머금은 채 황금 복숭아나무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황금으로 이루어진 잎사귀 몇 장을 뜯어내 그것을 곱게 갈아 희미한 영체 위로 뿌렸다.

잠시 뒤.

놀랍게도 황금빛 가루가 스며들자 영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소리.

“으음.......”

“담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혀, 형님?”

“그래. 나다, 나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길천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커졌다. 놀랍게도 영혼의 정체는 비담이었다. 서기처럼 영체의 주위를 감싸던 황금빛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해진 비담의 영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내 덥석 길천을 얼싸 안았다.

“형님.”

“그래, 담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누.”

둘은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길천은 그런 비담의 등을 토닥이며 계속 ‘그래’ ‘그래’ 만을 되뇌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격한 포옹을 푼 비담의 영체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형님,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제 상단전은 아닌데......”

“여긴 내 집이지.”

“네? 형님의 집이라고요? 그럼 이곳이 선계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선들이 머무는 도가의 성역.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별천지,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지.”

“그, 그럼.......제가 죽었다는...?”

“흐음. 네 짐작이 맞다. 인간세상하곤 작별을 고한거지.”

“어, 어쩌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전혀 기억하질 못하는구나.”

“그러게요. 시커먼 암흑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요. 가만 그러고 보니 화산파에서 어떤 양반을 구해내 옆구리에 끼고, 객잔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뭐죠? 혹시 형님께선 뭔가 알고 계시나요?”

“서희.”

“네? 서희가 무얼? 으윽. 뭐, 뭐죠? 이 떨림은......”

서희라는 이름을 되뇌이던 비담의 영체가 급격히 요동쳤다. 그러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다가 힘겹게 한 자 한 자 뱉어 냈다.

“서...서희. 그래요. 서희가 간악한 놈들에게 짓밟힌 채......싸늘한 모습으로 누워있었......크아악!!!”

비담의 영체가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길천은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비담이 진정되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비담의 영체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한 것이다.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비담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서희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전신의 귀기를 개방했어요. 그리곤 영혼의 끈을 놓아버렸지요. 맞아요. 그랬어요.”

“네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냐. 다 안다.”

“그나저나 죽는 것도 별 거 아니네요. 그리고 이리 죽고 보니 이승에서 겪었던 삶에 대한 미련도 희미해지고. 많이 애석하지만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야죠.”

“흐흐, 별 거 없기는. 다 잘난 이 형님 덕분에 그리 느끼는 거지.”

“네? 그럼 별 거 있어요?”

“당연하지. 너 이 황금나무 보이냐?”

길천이 자랑스레 황금 복숭아나무를 가리켰다. 비담은 그동안 길천과 이야기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나무를 그제야 돌아보았다.

“엥? 무슨 나무가 이리 화려하데요? 그나저나 이거 팔면 값은 얼마나 나가려나? 근데 선계에서도 물건 사고팔고 그래요?”

“야, 이 새끼야. 귀하디 귀한 나무보고 팔아치울 생각부터 하냐?”

“에이, 그럼 저걸 어디다 써요? 보아하니 황금이라 불쏘시개로도 못 쓰고, 열매 하나 변변히 열지 않겠구먼.”

“야, 임마. 저거 황금선도가 맺는다는 황금복숭아나무야. 천계 최고의 보물이라고.”

“예? 열매가 열린다고요? 아무리 선계라도 그렇지...무슨 누런 금속에서 열매가 열린데요?”

“예전부터 누누이 말하지만 제발 어휘선택 좀 신중히 해라. 신성한 나무 앞에서 부정 타려고 그리도 주절주절 떠들면 어떻게 해?”

“흠흠, 그리 대단한 나무인줄 몰랐죠. 원래 겉모습이 요란하면 실속이...”

“쉬~잇!!! 조용히 해. 아니 그냥 그 입 닫아.”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그나저나 그리 대단한 물건이에요?”

“무, 물건? 흐으, 더하면 내 입만 아프지. 뚫린 입이니 그냥 너 편한 데로 나불거려라. 아무튼 이 물건, 아니 황금 복숭아나무님 덕분에 네가 이리도 멀쩡히 영체 상태로 있는 거야.”

“아, 답답하게. 예전 버릇 또 나오신다. 그러니까 왜 그런지 속 시원히 빨리 말해달라고요.”

“흠흠.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서. 알았다. 속 시원히 말해주마. 원래 육체에서 혼이 빠져나오면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간다. 들어봤지?”

“뭐 저자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그런 말들이 있었죠. 물론 믿진 않지만. 그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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