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구인철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다시 떴다. 그리고 복잡한 심경을 두 눈 가득 담아 죽은 듯 누워있는 비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의혹과 고뇌. 왜 자신의 매제는 이지를 상실한 채 그리도 끔찍한 혈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찢어 죽이고, 유린하고 짓밟았을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휴우.”
구인철의 입에서 또다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늘어나는 한숨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구인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내 동굴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밖으로 걸어 나온 구인철을 맞이한 건 밤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그저 무심히 하늘을 올려보며 또다시 밀려 나오는 긴 한숨을 속으로 집어 삼켰다.
그렇게 무심한 듯 서 있기를 한 식경.
구인철 앞으로 새까만 인영 하나가 솟아오르듯 나타났다. 전신을 흑의로 뒤덮은 자의 정체는 흑천대의 막내 20호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바로 부복하며 구인철에게 한 장의 봉서를 건넸다.
“흑막주가 보낸 전갈이옵니다. 대주님.”
“흠...혈안.....비담의 일은 전하였더냐?”
“네. 대주님. 아마도 그에 대한 답신인 듯하옵니다.”
구인철은 서둘러 봉서를 열어보았다.
-비담 공자님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어찌 그런 참담한 일이 생겼는지 슬픔으로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립니다. 분명 대주님의 말씀대로 수많은 의혹들이 산재하기에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당시 상황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주제넘지만 은공의 목숨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리 소식을 급히 전하는 연유는 열흘 전 벌어졌던 모용세가의 참사에서 새로운 정보들이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의문의 혈의인들의 정체는 사도련의 혈살대로 밝혀졌습니다.
모용세가의 참사를 기점으로 사도련이 전면에 나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곧 제 2차 정사대전이 일어나리라 확신합니다.
곳곳에서 속속 올라오는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정회 역시 두 개의 큰 축을 잃었기에 경각심과 응집력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곧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안가는 흑천대원에게 알려드렸습니다. 모쪼록 비 공자님의 상세가 하루속히 회복되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읽은 구인철의 얼굴이 순간 구겨지고 말았다.
정사대전.
늘 준비를 하며 지냈지만 막상 이리 닥치니 씁쓸했다. 그리고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비담이 저리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때에 하필 정사대전이 벌어지다니. 그렇게 몇몇 누군가의 야심과 허황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될는지.
구인철은 받아야할 혈채가 있었기에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다음 조용히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2 차 정사대전이 일어날 듯싶구나. 미안하다. 꼭 곁에서 지켜주려 했건만...”
“아니에요. 상공은 반드시 제가 회복시킬 터이니 걱정 마시고 서둘러 맹으로 떠나세요.”
“그래. 너의 정성이 하늘에 닿는다면...담이는 분명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곳에서 녀석을 돌보기엔 너무 열악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특별히 막주님께 부탁하여 안가 하나를 마련하였으니 그곳으로 옮기거라. 장소는 밖에 있는 녀석이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제발 네 몸 역시 잘 돌보고 마음을 굳건히 하거라.
돌보는 네가 강건해야만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버티며 지킬 수 있을 것이야. 그럼, 이만 가보마.”
“네. 오라버니도 조심하세요.”
구인철은 울컥 밀려드는 슬픔을 지우려는 듯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짧은 전음만 흑천대원에게 남긴 채.
- 부탁한다
20호는 아스라이 사라지는 구인철을 향해 허물어지듯 부복하며 자신의 가슴에 강하게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 복!!!명!!!
장백산에 마련된 흑막의 안가.
사경을 헤매는 비담과 서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굴을 떠난 지 정확히 열흘 후.
황제와 오정회의 칼날이 비담을 향해 있고, 또한 그의 상태가 위중하였기에 부득불 이민족이 사는 이곳까지 쫓기듯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흑막주의 배려와 흑천대원의 노력으로 무사히 도착하였다.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서희는 그 바람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멍하니 골짜기 건너만 바라보았다.
끼익
20호는 아담한 초옥의 문을 열고 나와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산이 깊어 바람이 제법 찹니다. 그만 들어가심이...”
“......조금만 더......있을 게.”
“허나......네, 알겠습니다.”
20호는 그저 말없이 흩날리는 서희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전히는 아니나 어느 정도 아가씨의 심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쫓기듯 이곳 변방까지 공자님을 모시고 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 근방에서 제법 실력 있는 용한 의원조차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하였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을까. 정말 하늘의 보살핌으로 비공자님이 깨어나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만. 정말 답답하고 애석하구나.’
20호는 그렇게 걱정 가득한 눈으로 한동안 더 서희의 곁에 머물다 다시 초옥 안으로 들어가 비담을 보살폈다. 아마도 아가씨는 오늘 역시 쉬이 들어오지 않으리라. 아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리라.
상상조차 하기 싫은 두려운 현실과 상황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것을 피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자 소리 없는 절규.
그렇게 장백산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의 밤은 깊어만 갔다.
잔뜩 웅크린 희뿌연 물체 하나.
온 사방을 가득 메운 어둠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물체를 집어삼키려는 듯 넘실거렸다. 희뿌연 물체는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어둠이라는 높은 파도에 그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점점 어둠이라는 괴물에 잠식당해 사라질 찰나. 한 줄기 눈부신 섬광이 번개처럼 그 물체를 향해 쏘아졌고,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의문의 물체 역시 함께 사라졌다.
솜처럼 하얀 대지.
끝없이 펼쳐진 하얀 대지의 정체는 놀랍게도 구름이었다.
잔잔한 물결조차 일지 않는 광활한 운해(雲海)의 끝자락. 인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루거각 한 채가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구름 위에 지어진 건축물,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건물의 중앙 편액엔 용사비등한 필체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옥황궁(玉皇宮)
편액 아래 거대한 두 개의 문을 통과하고, 끝없이 펼쳐진 중앙 회랑을 지나 다다르자 그곳엔 황금빛 찬란한 옥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옥좌의 중앙. 면류관을 근엄하게 눌러 쓴 옥황상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냐?”
“그러하옵니다.”
“길천에게 약조나 잘 지키라 하여라. 인과율을 어겼으니 다른 녀석들이 알게 되면 크게 곤욕을 치를 터.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 잘하고.”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길천을 향한 신뢰가 다가오는 싸움에서 가장 큰 변수이기에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안다. 그러니 이리 미친 짓도 서슴지 않고 벌인 것 아니더냐. 그만 데려다 주어라.”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동천왕 패도는 상제를 향해 깊게 읍을 한 후 희미한 영혼 하나를 옆에 낀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패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담담히 응시하던 옥황상제가 또다시 툴툴거렸다.
“상제 체면에 나무 관리나 하는 녀석 따위에게 굽실거려야 하다니. 휴우.”
잔뜩 일그러트린 옥황상제의 얼굴에 주름 하나가 더 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