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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131/154)
  • 131화

    제 14 장 회자정리(會者定離)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동굴 안 연못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며 울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

    규칙적으로 울리는 물방울 소리를 배경 삼아 한 인영이 시체처럼 반듯이 누워 있고, 그 옆엔 웅크린 그림자 하나가 말없이 그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방울 소리만 아니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그림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림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동굴의 일부라 여겼던 그림자 하나가 거짓말처럼 입을 열어 고요했던 정적을 깨트렸다.

    “오셨어요?”

    “그래...흐음...아직 그대로더냐?”

    “네.”

    짧은 문답 후 또다시 이어지는 긴 침묵.

    새로이 파문을 일으켰던 정체불명의 인영은 긴 침묵이 답답했던지 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서희야...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는 것이...”

    “...........싫어.”

    “하지만...이러다 너마저...”

    “됐어요. 그만 하세요, 오라버니.”

    고저 없이 울려 퍼지던 음성에 진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인철은 말없이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서희의 등을 쓸어보았다.

    놀랍게도 슬픈 음색의 주인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희였다. 시봉세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비운의 여인. 그로인해 비담은 이지를 상실한 채 혈안광마가 되지 않았던가.

    인철은 죽은 듯 누워 있는 인영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후우, 천우신조로 미약하게 숨은 붙어 있으나...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죽은 듯 누워있던 인영의 정체는 바로 비담이었다. 하지만 둘의 침묵이 말해주듯 그의 상태는 매우 위태로웠다.

    구사일생 모용세가에서 구인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나 과도한 선천지기의 사용과 전혀 몸을 돌보지 않았던 혈안광마의 행적으로 인해 이미 육체는 만신창이였고, 영혼 역시 스스로 유폐하여 주인 없는 허수아비 상태였다.

    인철은 기식이 엄엄한 비담과 애처롭게 흔들리는 자신의 여동생을 말없이 그저 바라보다 이내 옆에 덩그러니 앉았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둘을 지켜주고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던 인철의 눈에 동굴 천장의 물방울이 들어왔다.

    주르륵, 똑.

    주르륵, 똑.

    무엇이 그리 슬픈지 쉼 없이 흐르는 물. 그리고 물방울.

    인철은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였다. 그러다 스르르 감긴 그의 눈에서도 똑같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방울.

    그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저편으로 되돌아갔다.

    인철은 마냥 신이 났다. 맹으로 돌아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빙소저와 오붓하게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신나게 하고 기쁘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내락이었다.

    전전긍긍하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 아버지는 빙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개탄하였고, 자신이 내비친 진심에 대해서도 여과 없이 믿어주고 받아주셨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 비담과 서희가 돌아오는 대로 합동 혼례를 치르자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인철은 그 순간이 마냥 꿈인 듯 얼떨떨해 자꾸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었다. 그래서 한달음에 낙양으로 달려갔다. 누구보다 축하해줄 자신의 동생과 매제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지만 자신의 동생과 매제는 화산으로 떠난 후였다. 괜찮았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화산으로 찾아가면 그 뿐.

    맹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전서응에 급전을 적어 화산으로 날렸다. 큰 선물이 있으니 기대하라고. 물론 둘에겐 아직 비밀이다.

    그렇게 쏜살같이 달려간 화산. 어라, 그런데 중간에 서희를 만났다.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저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어찌 알고 나왔느냐 물었더니 서희는 내 주위를 맴맴 돌던 전서응을 보고 달려왔단다. 그랬구나, 맹에서 키우는 이 녀석을 서희가 모를 리 없지. 먼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으니 알아챌 수밖에.

    우리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가로이 걸었다. 아직 서희에겐 비밀이다. 담이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 폭탄선언을 할 것이다. 깜짝 놀랄 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흐흐, 얼마나 살 떨리게 유쾌하던지.

    서희는 종알종알 잘도 떠든다. 매제와 오붓하게 화산으로 유람을 왔단다.

    뭐, 신혼여행이라나. 크크, 그 여행 나도 곧 있으면 할 테니 하나도 안 부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변하여 내가 방해했다며 쌍심지를 켠다. 하지만 넓은 아량으로 웃어 넘겨주었다. 곧 있을 폭탄발언으로 시원하게 날려줄거니 그 정도 징징거림은 웃으며 받아준다.

    그러다 담이는 어디가고 혼자냐 물었다. 담이는 급한 일이 있어 아직 화산파에 머무른단다. 잘 마무리하고 곧 온다하였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러며 무엇을 상상했는지 얼굴이 발그레 물든다. 허허, 눈꼴시려워 못 보겠으나 그것도 웃으며 받아준다.

    그렇게 서희가 묵고 있다는 객잔을 향해 한참 걸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지근거리. 불현듯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과 정체불명의 기운. 나는 화들짝 놀라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둘의 가슴은 순간 서늘해졌다. 객잔이 있는 방향. 그곳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굉음과 사이한 기운. 예감이 좋지 않다. 가만, 그런데 이 기운은...언젠가 담이가 내 보였던 그 기운과 비슷해 보인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서희 역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 뒤를 따랐다. 우린 객잔을 향해 달리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괜스레 입이 방정일 것을 저어했기 때문에.

    그렇게 도착한 객잔 앞은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 시체, 시체. 피가 하얀 눈밭을 물들였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과 머리. 그냥 한 폭의 지옥도였다. 누가 대체 이리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서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동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곳을 지나 객잔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간 객잔 안. 그런데 그곳에도 역시 보아서는 안 될 끔찍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피로 물든 침상 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매영의 시신. 그 끔찍한 광경 앞에 서희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부흥상회에 있어야 할 매영언니가 저리 싸늘히 누워있냐며. 어째서, 도대체 왜, 무슨 연유로.

    그런데 우리 둘을 더 기함하게 만들었던 물건이 매영의 음부 위에 놓여 있었다. 저건...저 물건은...담이의 화류선. 그럼 담이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방금 전 정체불명의 괴기스러운 기운의 주인이 담이었단 말인가.

    답답하다. 가슴에 천근거석을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하다.

    도대체 이곳에서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매영의 시신과 담이가 연관이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수많은 시체와 담이가 관련된 것인가? 나는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의문들로 인해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까지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허나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나는 서둘러 매영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화류선 역시 서희에게 넘겼다.

    그리곤 다시 벼락에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떤 후 곧바로 다시 지옥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담이가 저 안에 있다면...말도 안 된다며 거듭 자책하며 미친 듯이 시체더미를 뒤졌다. 다행히 담이는 없었다. 정말 다행히.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물론 수많은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지만 담이를 우선 만나야겠다. 그러면 이 끔찍하고 답답한 상황이 풀릴 것이다. 그렇게 서희와 나는 미친 듯이 그를 수소문했고 행적을 쫓았다. 하지만 끝내 담이의 행적을 찾을 순 없었다.

    미치기 일보직전. 흑막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불현듯 등장한 혈성 하나로 인해 전 무림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그의 별호는 혈안광마. 그로 인해 하북팽가가 멸문했단다. 끔찍하게도 그 악마는 모두 찢어 죽였단다.

    마치 객잔 앞에서 보았던 수많은 시체들처럼...가만..............설마.............설마..............에이.......설마........하지만 신기루처럼 행적이 묘연한 담이. 우연처럼 같은 시기에 등장한 혈안광마. 객잔 앞에서 보았던 장면들.

    하지만 그런 천인공노할 악마 같은 짓을.......설마......아닐거야........

    그러던 그때 흑막주로부터 다급한 전갈이 또 날아들었다. 혈안광마의 행선지가 모용세가로 이어진다고. 장담은 할 수 없으나 십중팔구는 그곳이 목적지라고. 서희와 나는 밀려드는 불안감과 끔찍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모용세가로 찾아갔다.

    그리고.......그곳에서 다 죽어가는 담이를.......우리......담이를 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혈의 복면인들의 혼란을 틈타 무작정 담이를 업고 그곳을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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