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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130/154)
  • 130화

    청송과 백송은 급격히 어두워진 낯빛으로 혈안광마를 응시하였다. 하지만 두 노인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혈안광마의 눈빛은 본연의 검은 빛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방금 전까지 혈풍을 불러 일으켰던 살귀와 동일인물인지 짐작하기 어려울정도로 담담한 기운만이 그의 전신을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혈안광마의 신색에 청송과 백송 두 노인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지켜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군. 방금 전까지 미쳐 날뛰던 그놈이 맞는가?”

    “흠, 그러게나 말일세.”

    얼떨떨한 표정으로 혈안광마를 응시하는 그 순간.

    혈안광마의 입에선 긴 장탄식과 함께 씁쓸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후~우. 쯧쯧,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리 슬프고 억울했더냐. 그나저나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쓰고 영혼마저 스스로 유폐시켰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혈안광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먼 하늘만을 응시한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채워져 있던 살기와 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장내는 이내 무거운 침묵과 당혹스러움으로 채워졌다.

    청송과 백송 역시 돌변한 혈안광마만 응시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게 순간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질 찰나. 먼 하늘만 응시하고 있던 혈안광마의 눈이 돌연 청송과 백송을 향해 돌려졌다. 그리곤 이어지는 장탄식.

    “흐~음. 너희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 여기서 그만 마무리 하자꾸나. 마음 같아선 담이를 이 지경으로 내몬 너희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만 시간과 능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럼...슬슬 마무리를 짓자.”

    푸념처럼 이어지던 독백이 끝나자마자 혈안광마는 곧바로 몸을 띄웠다. 그리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멍하게 서있던 청송을 향해 자줏빛 장강을 쏟아 내었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어지는 장강의 물결. 청송은 살을 에일 듯 밀려드는 자줏빛 장강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나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크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와 함께 청송의 신형이 무려 3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백송의 절규.

    “청~~~~~~~~송!!!!”

    비명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송이 다급히 청송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보기 흉할 정도로 가슴이 함몰된 청송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백송은 부릅뜬 눈으로 거듭 청송을 끌어안고 흔들었으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조금 전까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것이 한바탕 꿈인냥 너무나 허무한 지기의 죽음.

    “어...어찌 이럴 수가...”

    멀리서 아무런 감응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던 혈안광마는 지기의 죽음에 절규하는 백송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예의 그 장강을 펼쳤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구나.”

    콰콰콰~쾅

    또 다시 이어지는 죽음의 물결.

    허나 백송은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평소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어느새 자신의 애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장강의 물결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혈안광마는 차분히 가라앉은 백송의 기도를 보며 그만 탄식을 뱉고 말았다.

    “흐음. 요행은 한 번으로 족하단 말인가. 참으로 애석하구나. 담이와 나를 위해 둘은 데리고 가야할 터인데... 조금만 더 힘과 시간이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백송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혈안광마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곤 원한이 가득 배인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하였다.

    “절대 용서치 않겠다. 청송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따라 가거라.”

    백송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최후초식인 ‘백운첩영(白雲疊影)’을 펼쳤다.

    그러자 하얀 운무로 변한 검강들이 중첩되며 장내를 가득 메웠고, 모아진 기운들이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루어갔다. 백송은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검이 또렷한 형상을 이루어내자 그대로 혈안광마를 향해 쏘아 보냈다.

    혈안광마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백색의 거대한 검을 바라보며 툴툴 웃었다.

    “후후, 아쉽지만 여기까지구나. 미안하다, 담아. 그리고...고마웠다.”

    혈안광마는 득도한 고승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전신의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리곤 거대한 검에 맞서 있는 힘껏 손을 내밀었다.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장내에는 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간 기의 여파에 멍하게 싸움을 관전하던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주르륵 밀려나거나 휘청 쓰러지고 말았다.

    무리한 내공의 사용으로 시커멓게 죽은피를 한 모금이나 뱉어낸 백송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기운에 풀썩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찾아든 정적.

    뽀얀 먼지가 장내를 뒤덮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지만 이내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에 일목요연 처참했던 현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움푹 패여 들어간 거대한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한 사내. 가주 모용선은 자신의 가문을 위협했던 희대의 광마가 시체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흐음, 정녕 하늘이 우릴 도왔구나. 아차! 백송 어르신은?”

    모용선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른 시선을 돌려 백송을 찾았다.

    구덩이의 가장자리.

    힘없이 풀썩 무릎을 꿇고 앉은 백송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용선은 다급한 마음에 급히 신형을 날려 그에게 달려갔다. 허나 모용선의 얼굴은 백송을 부축함과 동시에 그만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 어찌 이런...”

    백송 역시 이미 시체가 되어 부축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힘없이 한쪽으로 꺾였기 때문이다. 모용선은 자신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낯선 광경에 그만 넋이 나가 하염없이 백송의 시신만 쳐다보며 ‘어떻게’ 라는 말만 거듭 되뇌었다.

    하지만 모용가의 가주라는 자리는 그렇게 넋이 나간 채로 마냥 슬픔과 통한에 젖어 있는 것을 허락지 않는 엄중한 위치였다. 이내 신색을 회복한 모용선은 멍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두 분 어르신을 정중히 모시고 장내를 수습하라.”

    “알겠습니다, 가주. 헌데 혈안광마의 시신은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혈안광마라는 말에 순간 모용선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허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차분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무림공적 따위에게 차릴 예 따위는 없으나 우선은 그 역시 수습한다.”

    “허, 허나 저 악마에게 빼앗긴 가솔들의 원혼이...”

    “안다. 허나 비통함을 달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우선은 잘 수습하여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콰쾅 

    침중한 어조로 이어지던 모용선의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울려 퍼진 엄청난 폭음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모용선의 다급한 외침에 무사들은 폭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분분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유성대원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부복한 채 보고하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백의 혈의 복면인들이 세가의 동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허어! 혈안광마의 참사가 겨우 수습되었거늘. 누군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지금의 때를 기다렸구나. 모두 듣거라. 세가를 침입한 자들에게 돌려줄 것은 참담한 응징뿐이다. 나를 따르라.”

    모용선은 세가를 향한 거듭되는 위협과 침입에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전 무사를 이끌고 동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모용선이 몸을 날린 것과 동시에 장내에 의문의 그림자 하나가 뛰어 들었다. 온몸을 흑의로 꽁꽁 둘러싼 의문의 그림자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 후 덩그러니 놓여있던 혈안광마의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한 점 망설임 없이 혈안광마의 시신을 들쳐 업고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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