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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154)

129화

“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군. 마기나 사기처럼 요사스러운 기운과 일면 비슷해 보이는데 정확히 일치한다 말할 수도 없고. 저돌적인 움직임과 요사스러운 기운에 잠식당해 검사들이 두려워하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나 무공수위와 움직임 자체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불안정하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압할 수 있겠군. 허나 그래도 유운성쇄를 혼자의 힘으로 분쇄한 괴물이니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해 자네와 내가 합공을 하세나. 길가에 싸질러 놓은 누군가의 똥을 치우다 옷에 묻는 것만큼 기분 더럽고 난감한 일도 없으니.”

“후후, 직접 똥을 치우러 나선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옷을 망쳐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럼 시작하세.”

백송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청송인지라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곧바로 큰 노호성과 함께 미쳐 날뛰는 혈안광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백송 역시 뒤질세라 하얗게 빛나는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고는 곧바로 전장 한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놈!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미쳐 날뛰느냐. 그동안 네놈이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징벌로 고이 죽여줄 것이니 억울해하지 말고 저 세상으로 가거라.”

청송의 손이 푸르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큼지막한 장강(掌?)이 형성되어 비담의 등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혈안광마의 몸이 2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청송은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적중했음을 느끼고 만면에 희희낙락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서는 혈안광마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부르르 입가를 경련하며 돌아서는 혈안광마의 얼굴이 무척 화가 난 것을 대변해주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충격이나 상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려 팔성의 공력을 담은 청운장(靑雲掌)에 맞고도 저리 멀쩡하다니. 백송이 말한 기운의 정체가 외공이란 말인가? 허나 발경의 묘리를 운용했으니 내부가 진탕되어야 마땅하거늘 어찌 저리도 태평한 모습이란 말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청송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어느새 시위를 떠난 살처럼 몸을 날린 혈안광마의 주먹이 청송의 가슴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네 이놈!!”

돌아가는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송이 청송의 정신을 일깨우려는 듯 큰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혈안광마를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 그었다.

혈안광마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주변을 잠식하며 쪼개려는 듯 다가오는 검강에 달려오던 탄력과 관성을 무시한 채 크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목표물을 잃어버리고 애꿎은 허공에 검을 휘두른 백송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있는 청송을 다그쳤다.

“정신 차리시게. 적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자네도 보았는가? 어찌 인간의 육신으로 팔성에 달하는 청운장에 맞고도 멀쩡할 수 있으며, 더불어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허허, 이사람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는 저놈을 제거하기 위해 이곳에 나온 것이지 저놈의 무공을 견식하고 품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란 말일세.”

“허나...저놈의 움직임에서 수십 년째 답보 상태인 지금의 경지를 넘어설 수 있는 단서가 잡힐 것도 같은데 이 기회를 어찌 놓친단 말인가?”

“그럼 우선은 저놈을 없애고 그 다음에 지금의 상황을 복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경계를 부수고 넘어선다는 것이 무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네만 그래도 우선은 살아야 그것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도 방금 겪어봐서 알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저놈의 움직임이나 몸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네. 일견 단순 무식해 보이는 움직임이지만 직접 격돌해보니 우리의 오판이었음이 확실하네. 순간이었지만 동물을 능가할 정도의 감각과 움직임, 거기에 힘까지 겸비한 녀석일세. 결코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될 녀석이야.”

백송의 눈빛이 더욱 차갑고 깊게 가라앉았다. 혈안광마에게 가졌던 처음의 가벼운 마음은 이미 저만치 던져버린 상태였다.

혈안광마는 무엇이 불만인지 작게 그르렁거리며 두 노인을 직시하였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무사들과는 무위나 분위기 면에서 사뭇 달랐기에 이지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을 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성을 상실한 채 미쳐버린 혈안광마의 진중함이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자신을 경계하며 선뜻 공격을 가하지 않는 두 노인에게 화가 난 듯 곧바로 다시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니까.

부아앙 콰쾅

거북한 소리와 함께 공기가 찢어질 듯 터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 주먹을 뻗는 혈안광마의 모습에 청송과 백송은 기함을 하며 사력을 다한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최대치로 끌어올린 내공으로 인해 아랫배의 단전이 따끔거리고, 온몸 여기저기의 근육들이 저릿하게 아려올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녀석의 주먹에 어디 한 곳이 온전치 못했을 아찔한 상황.

“크아악!!”

혈안광마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에 분노한 듯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청송을 향해 재차 몸을 날렸다. 청송은 자신을 목표로 성난 멧돼지마냥 달려드는 혈안광마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훤히 드러난 그의 허점을 향해 자신의 성명절기인 청운장의 최후초식을 사력을 다해 날렸다.

콰콰쾅

연이은 폭음과 함께 혈안광마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입가로 가는 혈선만 내보일 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대로 몸을 일으켜 달려드는 혈안광마였다.

청송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황급히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허, 도대체 저런 괴물이 여태껏 어디 숨었다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콰쾅, 주르륵.

청운장이 적중할 때마다 실 끊어진 연처럼 저만치 날아갔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혈안광마.

오히려 피하며 때리는 청송이 지칠 지경이었고, 실제로 그의 호흡은 처음에 비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허억! 허억!”

멀쩡하게 서있는 벽을 향해 내리 주먹을 날리는 기분이 이와 같을까.

차라리 벽이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없으니 그나마 심력의 소모가 적을 테지만 눈앞의 괴물은 단순하긴 하지만 오금이 저려올 정도의 공포스러운 공격을 끊임없이 날리니 귀찮은 것을 떠나 자신의 수명이 단축되는 짜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백송의 검이 하얗게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혈안광마의 뒤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찌이익, 그그극

철판을 못으로 긁는 듯한 거북한 소리와 함께 혈안광마의 신형이 조금 전과는 달리 눈에 뛰게 부르르 진동하며 떨렸다.

충격이 만만치 않은 듯 조금 전과 달리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혈안광마.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지는 귀곡성.

“크르르륵! 끼요옷!”

살아남아 싸움을 관전하고 있던 모용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소름끼치는 소리에 저마다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혈안광마의 전신을 감싸듯 흐르는 무거운 자줏빛의 광채.

분위기 역시 무식하게 날뛰며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고개를 이리저리 모로 꺾으며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혈안광마의 핏빛 눈동자가 더욱 진하게 물들자 그 눈빛을 마주한 청송과 백송은 돌덩어리라도 얹은 듯 가슴 한편이 무거워짐을 느꼈고, 둘의 뇌리를 똑같이 지배하는 한 가지 생각.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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