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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54)

128화

시퍼렇게 날이 선 수백 개의 검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은 반짝이는 검으로 만들어진 사신의 그물이었기에 누구하나 아름답다 말하는 이는 없었다.

비담은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수백 개의 검들을 무신경하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200명의 검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빛의 속도로 쇄도해 오는 비담의 모습에 순간 움찔하였으나 검진의 위력을 믿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비담과 유운성쇄의 첫 격돌이 이루어졌다.

콰쾅

흡사 포탄이라도 터지는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방진이 비담의 힘을 상당부분 흡수, 분산하였기에 검사들이 받는 충격은 미비하였다.

애초 강력한 힘을 지닌 일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방어와 수비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검사들은 첫 번의 격돌로 용기백배하여 잠재되어 있던 두려움을 밀어내고 다시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였다.

비담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 화가 난 듯 더욱 강하게 밀어 붙였다.

쾅, 콰쾅, 쾅쾅.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는 땅과 대기.

연이은 폭음이 들렸으나 검진은 요지부동 그 자리를 고수하였다. 검사들 역시 이제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비담에게 조소까지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휴우, 하북팽가가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어떤 괴물일까 잔뜩 긴장하였는데 생각보다 별로군.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된다니까. 그나저나 저 괴물만 없애면 우리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겠지. 히히.’

그런데 검사들이 진의 탁월함에 취해 혈안광마가 주었던 공포를 극복하려는 찰나 거듭된 실패로 결국 폭발해버린 비담이 자신의 귀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촤아악 끼기긱

철판을 못으로 긁는 듯한 뾰족한 소리가 연이어 터지더니 비담의 장삼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비담의 눈이 더욱 핏빛으로 물들며 붉어지더니 머리카락 전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승리를 예감하며 달콤한 환상에 빠져있던 모용선은 오싹한 한기가 장내를 잠식해가자 급박한 경고성을 토해냈다.

“모두 조심하라. 자신의 자리를 절대 이탈하지 말고 저자의 공격에 대비하라.”

검사들은 가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지 않아도 피부에 와 닿는 소름끼치는 기운에 이미 긴장하며 대비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기운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힘이었기에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킨 채 비담을 응시하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귀기를 몸에 두른 비담이 다시 한 번 빛의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쿠르릉 쾅쾅

조금 전보다 한결 커지고 굵어진 광음과 함께 유운성쇄의 한쪽이 일그러졌다. 다행히 검진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검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고, 여기저기 입가에 피를 흘리는 낭패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가벼운 충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무식한 힘이라니. 어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으로 이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흡사 만근 거석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정도 충격은 아닐 텐데. 으으윽.’

‘광마의 힘이 약해지면 공격을 하려 했건만 이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만에 하나 진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모용선은 거듭 진을 향해 돌진해가는 비담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애초 유운성쇄의 무서운 점은 사냥감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올가미에 걸려 발악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는 사냥감.

그리하여 지칠 대로 지친 사냥감에게 연쇄공격을 퍼붓는 것이 진의 기본 구성이었다. 물론 방어에 치중한 진이었기 때문에 공격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견고함과 퍼부어지는 압력으로 인해 본신의 힘을 모두 소진한 대상에게는 사신의 손짓처럼 무시무시한 연환공격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용선의 고민과 상관없이 비담은 무식하게 돌진을 시도하여 끊임없이 방진에 부딪쳐갔다. 마치 새끼 새가 자신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퍼버벙 쾅쾅

어느새 비담의 몸통 박치기도 백번을 넘어섰고, 그의 몸에 직격당한 방진의 형태가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

천고의 방어검진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모용선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유운성쇄가 깨지면 우리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저런 무식한 힘을 상대하려면 그분들께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저자의 힘도 진 때문에 많이 소진되었을 터. 그분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하실 수 있을 것이다.’

모용선은 결심이 서자 곧바로 자신 옆에 있는 유성대주 모용창에게 은밀히 전음을 날렸다. 전음을 모두 들은 모용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몸을 날려 장내에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유성대주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모용선의 시선이 다시 비담에게로 향했다.

‘그분들께서 나서주신다면...너는 끝이다.’ 

콰콰쾅

맑고 푸른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뇌성이 이어지길 반각.

혈안광마는 성난 소처럼 무식하게 유운성쇄를 향해 돌진, 또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회를 넘어설 무렵, 진이 한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크아악!!”

진을 구성하고 있던 검사들이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나동그라지고, 혈안광마는 진이 부서졌음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이미 기진맥진 축 늘어진 검사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하였다.

여기저기 처절한 비명과 함께 검사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어졌다. 나름 힘이 남아있던 검사들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검을 휘둘렀으나 자신의 생명만 재촉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모용선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검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침음성을 삼키고 말았다.

‘대일인 방어진으로는 최고라 자부했던 유운성쇄가 이리 허망하게 부서질 줄이야. 도대체 혈안광마의 무위가 어느 정도이기에...그나저나 세가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어서 그분들께서 오셔야 할 텐데.’

모용선은 세가의 전력을 유지한 채 하급무사들만으로 시간을 벌었다.

이미 방어진이 깨어진 마당에 세가의 혈족들마저 희생당하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우려는지 혈안광마는 이지를 상실한 사람마냥 그저 닥치는 대로 눈앞의 무사들만 도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용선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어느 순간.

멀리서 희끗한 그림자 둘이 연기처럼 다가와 그의 앞에 내려섰다. 희끗한 그림자의 정체는 하얀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신선풍의 두 노인이었다.

모용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며 두 노인을 향해 극진히 허리를 접었다.

“모용가주 모용선이 청송, 백송 두 어르신을 뵙습니다.”

소매에 청색의 띠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노인이 장내의 풍경에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인사는 됐네. 그나저나 저 놈이 요즘 강호를 피로 물들이고 있다는 혈안광마인가 보군.”

“맞습니다. 어찌나 날뛰는지 도저히 저희들의 힘만으론 역부족인지라 결례를 무릅쓰고 어르신들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차피 저자를 제거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우리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백송,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혈안광마의 행동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하얀 문사건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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