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같은 시각.
사도련의 대전 안에도 황궁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하의 보고를 받는 극현도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호오, 혈안광마라는 별호까지 생겼다고?”
“그렇사옵니다.”
“흐흐, 그자의 활약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군. 그나저나 그자의 행보는?”
“지금 현재의 이동경로로 보았을 때 다음 목표는 모용세가입니다.”
“모용세가?”
“그렇사옵니다. 하북팽가를 기점으로 곧장 북동진하는 것으로 보아 모용세가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합니다.”
“그럼 그자의 목표가 오정회라는 것이냐?”
“속단하긴 이르나 현재로써는 오정회를 목표로 움직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중간에 있는 중소방파 그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자가 만약 무림 자체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일을 벌였다면 진주언가 역시 무너뜨려야 앞뒤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진주언가를 버젓이 통과하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진주언가라면 창으로 이름을 떨친 전통과 역사가 있는 무가로군. 비록 오정회에 들진 못했으나 무림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세 역시 무시할 순 없지. 그럼 오정회를 목표로 움직인다는 말이 일리가 있겠어. 참, 황궁의 늙은 구렁이는?”
“아마도 이자의 뒤를 봐줄 것 같습니다.”
“까닭은?”
“오래전부터 무림을 말살하려던 자입니다. 누구보다 무림이 혼란 속에 자멸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흐흐, 아마도 어깨춤을 추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겠지. 하지만 우리로써도 전혀 손해가 아니니 황궁의 구렁이는 그냥 내버려둔다. 나중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려면 힘을 아껴둬야 할 터이니.”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후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야 무림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 우리 역시 그놈에게 힘을 실어준다. 혈살대(血殺隊) 300을 내보내 오정회의 길목을 끊는다.”
“복명!”
‘우선 무림에서 오정회를 지워버린다. 황제 역시 어부지리를 노리며 은밀히 움직일 터. 뒷날 황궁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자와 무림을 놓고 승부를 겨루려면 우선은 후방부터 정리하는 것이 순서겠지. 하늘이 나를 돕기 위해 혈귀를 보내줬음이야.’
“크하하하!!”
혈귀대가 입은 타격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 있던 극현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대전이 떠나가라 웃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이 자신을 무림지존으로 이끄는 것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혈안광마(血眼狂魔)’. 이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잠잠하던 무림이 요동치려 하였다. 바야흐로 혈우강호(血雨江湖)의 도래. 정사대전의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무림은 또다시 진한 혈향에 신음을 흘려야만 하리라.
피비린내 가득한 비담의 행보로 인해 강호무림은 때 아닌 몸살을 앓았다. 혈안광마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추적에 나섰던 정도맹은 의문의 무사들에 의해 지리멸렬 무너졌고, 모용세가로 지원을 나간 오정회의 무력 역시 핏빛 복면을 한 괴한들에 의해 길목이 차단당한 채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숨은 조력자(?)들을 얻게 된 비담의 행보는 거칠 것 없이 모용세가로 이어졌다.
봄의 기운이 완연한 포근한 오후.
“아~~하~~~암!!”
모용세가의 정문 앞을 지키던 장필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춘곤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하품으로 인해 눈물이 그렁 맺힌 그의 눈에 의문의 점 하나가 세가를 향해 곧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잉? 저, 저게 뭐지? 눈에 뭐가 들어갔나?”
장필수는 자신이 너무 졸려 헛것을 보았다 여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점으로 보이던 물체가 미끄러지듯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장필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런데 눈을 비비는 그 짧은 순간에 의문의 점은 어느새 다가와 그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장필수는 너무 놀라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최근 무림을 피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살인귀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장필수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고, 이내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급격히 떨려왔다.
덜덜덜 덜덜덜덜
“혀...혀.....혀......혈......안......광마.”
“모...용...세...가...지운다.”
혈안광마가 된 비담은 쓰러져 있는 장필수는 무시한 채, 높다랗게 걸려있는 모용세가의 현판만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말을 뱉었다.
장필수는 악몽이어도 괜찮으니 제발 이 순간이 꿈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다. 하지만 이런 장필수의 소원은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이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으~~~~~~~~아~~~악!!!”
콰광. 우지끈.
처참한 비명소리에 이어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비담이 장필수의 몸을 들어 그대로 현판을 향해 던져버렸던 것이다.
비담은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지는 현판을 잠시 바라본 뒤 이내 뚜벅뚜벅 모용세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땡땡땡땡
“혈안광마가 나타났다. 혈안광마가 나타났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급격히 세가 안에 퍼지고, 그와 동시에 무사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챙겨 분분히 정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세가의 일반 식솔들을 제외한 모용세가의 전 무사들이 혈안광마 비담 앞에 집결하였다. 물론 가주인 천응검(天鷹劍) 모용선 역시 무사들의 선두에 서서 비담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가가 무림에 세워진지 어언 수백 년. 그 숱한 세월 수많은 위기를 겪었으나 모두 이겨내고 당당히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우리다. 비록 하북팽가가 저자의 손에 무너졌다고 하나 우리는 그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보란 듯이 이번의 위기도 이겨내고 말 것이다.
단 일인에 불과한 혈안광마...기필코 저자를 죽여 세가의 저력이 어떠한지 만천하에 보여주고 증명하리라.’
모용선은 자신의 대에서 모용세가가 사라지는 끔찍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살인귀는 반드시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 혈안광마를 노려보며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의지를 다지는 모용선.
하지만 그렇다고 가주인 모용선이 하북팽가가 당한 전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팽가가 아무런 대비 없이 급습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들의 전력을 모조리 분쇄하고 파괴한 혈안광마였기에 모용선은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유운성쇄(流雲星鎖)
흐르는 구름과 별들마저도 모두 가둬버린다는 대 일인 합격진.
무려 200명의 세가 무사들이 한 명의 적을 향해 펼치는 죽음의 그물.
자유로이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 위에 떠있는 별마저도 가둘 수 있다는 거창한 이름.
그만큼 세가에 닥친 위기가 절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용선은 그만큼 자신하고 있었다.
‘현명한 선조들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까지 염두 해두셨다. 엄청난 무위를 지닌 한 사람에 의해 세가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으셨던 거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검진이 내 대에 이르러 쓰이게 되어 씁쓸하기는 하나 세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
모용선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혈안광마를 향해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후, 곧바로 검진의 발동을 명령했다.
“유운성쇄를 펼쳐라.”
모용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00명의 무사들이 일사분란 비담을 향해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검진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