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절명한 무사의 공포 가득한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이 가득했다.
무사가 허물어지듯 모로 쓰러지자 비담은 자신의 손에서 아직도 제 본분을 하기 위해 쿵쾅쿵쾅 뛰고 있던 심장을 그대로 터트려버렸다.
그리곤 붉은 눈을 들어 웅장한 필체로 써져있는 하북팽가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담의 눈이 닿자마자 현판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푸스스스스
“지....운......다.....”
비담의 신형이 꺼지듯 연기처럼 사라졌다. 비담이 사라진 자리엔 오직 그가 남긴 말과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현판뿐이었다.
다음 날.
무림은 경천동지할 소문 하나에 몸살을 앓고 말았다.
‘하북팽가 멸문.’
이 여섯 자가 무림에 던진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무림의 큰 축 하나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허황되고 과장된 소문으로 치부하며 그 누구하나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문을 가져온 이를 미쳤다며 놀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정도맹과 오정회에서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밝혔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도저히 믿기 힘든 현실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무렵 들려온 또 하나의 소문.
‘하북팽가를 멸문시킨 자의 정체는 혈안광마(血眼狂魔)다. 빨갛게 물든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손짓하리니. 피하라, 무조건 피하라.’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미친 악마.
그것이 비담에게 생긴 별호였다.
사람들은 소문 하나에 또다시 공포에 떨며 전율하였고...숨죽였다.
긴급 소집된 오정회 장로회의.
회의장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정회의 다섯 축을 담당하는 자리 중 한 곳인 하북팽가의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대세가의 장로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 천무신검(天武神劍) 모용수가 입을 열었다.
“하북팽가의 피해가 어느 정도나 되오?”
“전멸. 그 미친 악마가 지나간 뒤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더이다.”
“정녕 생존자가 없소?”
“조사를 담당했던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무공을 모르는 하인들을 제외한 하북팽가의 모든 식솔들이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같이 모두 끔찍한 모습으로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보고였소.”
“으흠.”
회의장 안은 또 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정사대전 이후 오대세가가 성세를 구가하며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참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단 1인에 의해서 말이다.
오정회 장로들은 큰 모멸감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그자의 출신에 대해 밝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손속이나 성정만 가지고 미루어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더불어 혈안광마가 무림전체를 겨냥하고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 오정회를 향해 발톱을 드러낸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시오? 단순히 원한관계로 치부하기엔 피해나 상황이 너무 끔찍한 것 같소만.”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북팽가가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잦은 마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런 참상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북팽가와 마찰이 있었던 곳들의 역량으로 보아 그만한 고수를 고용했다는 것도 역시 어불성설이고요. 그렇다면 단순히 광기에 휩싸인 미친놈의 소행이란 결론인데...아무래도 그자의 행보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저 역시 검황 이 친구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조금 더 지켜보는 게 현재로써는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자가 우리 오정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 그럴 수도 있으니 세가 자체적으로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자구책을 마련해야겠지요. 괜히 섣불리 뭉쳤다가는 사도련이나 황제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세가의 특성상 모두 혈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세가를 비우고 어느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인질을 제공하여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정도맹에서 혈안광마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추살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조금 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합시다.
”
“알겠소. 그럼 각자 세가로 돌아가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주시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이다.”
오정회 장로들의 실질적인 수장인 벽력수(霹靂手) 황보영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가 끝났음을 알렸다.
한편 황제가 머물고 있는 황궁의 대전 안.
홍력제는 동창의 수장으로부터 무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동창 제독의 구체적인 보고가 끝난 후, 홍력제는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하였다.
“하하하, 무림에 재미있는 녀석이 등장했구나. 아주 기특해.”
“어찌하면 좋을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폐하.”
“그 녀석 때문에 무림말살계획을 진행하는 게 아주 수월해지겠어. 물론 이번 사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놈들도 있겠지?”
“동창의 조사에 의하면 제일 먼저 정도맹이 움직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정파의 기치를 내걸고 잔인무도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하여 제거하는 것이 존재이유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정회는 어찌 나올 거라 생각하느냐?”
“집안 단속하는데 여념이 없을 것이옵니다. 비록 하북팽가가 몰살되어 사라졌다고는 하나 정도맹에 비하면 그들의 결속력은 약한 편이옵니다. 더불어 그들은 이문에 밝은 승냥이들이기에 서로 눈치만 보며 섣불리 뭉치려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후후, 그럼 각개격파 당할 소지가 다분하구나. 사도련이나 흑천맹의 움직임은?”
“사도련은 이번 사태를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저번 황궁에서의 사태나 각 문파에 간자들을 심어 내분을 일으키고 그들을 회유하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무림을 도모하는 자들입니다.
더불어 그만한 힘 역시 가지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그자를 지원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사옵니다. 반면 흑천맹은 정사대전의 여파가 채 수습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약할 것으로 보입니다.
”
“무림을 지워버리기 위해선 우리 역시 그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되겠구나. 당장 동창과 금의위에서 무공이 탁월한 자들을 선별하여 그 녀석을 지원하라. 단, 우리가 나섰다는 것을 들켜서는 아니 된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럼 어느 선까지 지원해야 할는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 녀석이 활동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주변만 정리해 주거라.”
“하명하신대로 거행하겠나이다.”
동창 제독이 길게 읍을 한 후 뒷걸음쳐 물러나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혈안광마라...역시 사냥을 하려면 숲을 뒤흔들어야 하는 법. 시의적절 나타난 유능한 몰이꾼이 짐을 돕는구나. 크하하하하.”
황제의 미소는 어느새 앙천대소로 바뀌어 큰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