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54)

125화

제 13 장 혈우강호(血雨江湖)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귀기.

비담은 혀로 입술을 한 번 쓰윽 핥더니 붉은 눈을 들어 자신의 앞을 막아선 자들을 바라보았다.

“죽기 싫으면......내 앞을 막지 마라.”

혈귀대주 마영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귀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과 숨 막힐 듯 터져 나오는 요사스러운 기운, 그리고 흡사 무저갱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으스스한 음성까지.

과연 이자가 그들이 조금 전까지 쫓았던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옷이며 생김새가 같은 인물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금쪽같은 대원들을 앗아간 주범이자 혈귀대의 명성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겨준 인물.

그냥 이대로 물러서기엔 그동안 쌓아왔던 지옥훈련과 악명이 너무 억울했다.

“흐흐,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가 호락호락 물러날 것이라 여겼느냐? 혈채에 대한 대가는 같은 피로 받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

“크히히히.”

대화를 나누기 귀찮다는 듯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와 함께 비담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혈귀대 50명은 갑자기 폭사된 귀기에 움찔 몸을 떨었고, 그것이 결국 그들을 옭아매는 덫이 되고 말았다.

비담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초식도, 무기도 없었다.

단순히 힘을 이용해 사람의 몸을 갈가리 찢는 단순무식하고 잔인한 손속뿐이었다.

마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맛보았다. 지옥훈련 동안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생경한 감정을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영은 두려움 속에 마냥 빠져있을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부하들의 비명과 한 폭의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주변 광경 때문이었다. 마영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저, 저자에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 명의 부하라도 더 살리려면...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퇴각하라. 전원 산개하여 목숨을 부지하라. 이건 명령이다. 어서!”

마영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미쳐 날뛰는 악마에게 대적할 치기 따윈 애초에 사치라는 듯 그는 무조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비담은 피로 얼룩진 얼굴을 쓰윽 손으로 한번 훑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키히히히히!”

비담은 만족스러운 듯 음침한 괴소를 흘리다가 이내 몸을 날렸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 뒤엔 오로지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와 피밖에 남지 않았다.

사도련주 극현도가 머무는 대전 안.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와 파르르 떨리는 극현도의 눈매가 예사 상황이 아님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혈귀대가 실패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처음 목표였던 멸사대를 제거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사오나 갑자기 등장한 괴한으로 인해 오욱을 놓쳤다고 하옵니다.”

“고작 멸사대의 피라미 몇 마리 제거하고 사라질 소모품들이 아니었거늘...몇이나 돌아왔느냐?”

“그것이 살아 귀환한 마영의 보고에 따르면 늦게 합류한 10명을 포함해 25명이라 하옵니다.”

“하하하, 고작 스물다섯?”

극현도의 광소에 대전 안의 공기가 부르르 진동하더니 이내 천장에선 먼지마저 떨어졌다.

“크윽, 계속 보고하겠습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본 결과 괴한의 무공수위는 최소 현경 급이라 사료되옵니다.”

“흐흐, 내가 혈귀대 100명을 상대로 75명을 도륙하고 남은 자들이 공포에 떨며 도주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련주님이라면 충분히...”

“갈! 사실 그대로를 말하라.”

“음...속하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련주님의 신위로도 가능성은 절반 이하라 여겨지옵니다. 동귀어진을 각오하시고 전력을 쏟아 부으신다면 중한 부상을 입으시겠으나 가능하기는 하옵니다.”

“바로 보았다. 나 역시 혈귀대 100명을 상대로는 힘에 부친다. 그만큼 그들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무섭다. 그런데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자다. 어찌 생각하느냐?”

“현재 마영을 포함한 혈귀대원 전부가 그자와 대적하며 느낀 공포로 인해 식음을 전폐한 채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영의 상태로 미루어 솔직히 엄청난 강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누구라 생각하느냐?”

“처음엔 그자의 잔인한 손속 때문에 천마신교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마기가 아닌 정체불명의 기운이 분명하다는 증언이 많았기에 그것을 접었습니다. 그렇다고 정도맹이나 은송림에서 그만한 고수를 키워냈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의 한계 상 아무리 욕심이 많다고는 하나 그렇게 잔인무도한 살인병기를 키워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황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공의 특성상 정파에선 그렇게 살기와 광기 가득한 인물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이 속하의 생각입니다.

“주화입마의 가능성은?”

“가능성은 있겠으나 희박해 보입니다. 괴기스럽다는 특성이 다를 뿐 혈귀대를 도륙하는 일정 시간동안 계속 유지한 것으로 보아 잠능을 폭발시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리무중이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미친놈이라...솔직히 그 녀석이 매우 탐나는구나. 하지만 혈귀대를 저 모양으로 만들어 써먹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혈채는 받아내야겠지. 팽철영의 시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사지간의 인물인 것 같으니 앞으로 그 녀석의 행보를 예의주시하라.”

“복명!”

혼자 남은 극현도는 재미난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흥미 가득한 얼굴로 태사의의 팔걸이를 툭툭 쳤다.

“흐흐, 재미있는 녀석이 등장했군. 마음 같아선 당장 련으로 끌어들이고 싶으나 통제하기가 만만치 않을 터. 누구를 겨냥하든 상관없으니 마음껏 무림을 흔들고 들쑤셔놓아라.”

극현도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하며 뜬금없이 나타난 의외의 변수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편 극현도가 여러 가지 계략을 구상하며 머리를 굴리던 그 시각.

광기에 휩싸인 비담이 하북팽가 앞에 나타났다. 세가의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은 봉두난발에 옷 여기저기 굳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비담의 행색에 잔뜩 긴장하며 더듬더듬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웨, 웬 놈이냐?”

“오........정.........회.......”

질문에 돌아온 답은 단지 오정회라는 을씨년스러운 음성뿐.

무사들은 흡사 귀신을 본 듯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가...감히 여기가 어...어디라고...썩 물러가지 못할까?”

“지.......운.......다......”

“뭐? 지워? 무엇을...으~~~~~악!!!”

그 비명은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대참사의 시작을 알리는 구슬픈 신호탄이었다.

비담은 찢겨진 무사의 시체를 옆으로 던진 후, 석상처럼 굳어 있는 다른 무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으....오지마. 크~~악!!”

비담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고 있던 무사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은 놀랍게도 팔딱팔딱 뛰고 있는 붉은 심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