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런데 비담이 한창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멀리서 그 모습을 오들오들 떨며 감상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오욱을 만나고 돌아가던 시방세 5남 2녀였다. 소름끼치도록 몰아붙이는 비담의 무위에 그들은 입이 벌어진 것도 잊은 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저 간악한 음적 놈의 무위가 저 정도라니...’
‘으윽, 세가에서 그리 영약을 먹고 무공을 연마하였는데...예전에 내가 봤던 수준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어.’
‘기필코 소미의 한 맺힌 원한을 갚아주겠다 다짐을 하였건만...감히 내 상대가 아니다.’
시봉세의 제갈현아, 팽철영, 모용천은 저마다 탄식과 함께 울분을 삼키고 말았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으로 눈앞에서 신나게 날뛰는 비담을 제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차라리 몸에 기름을 두르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하고 살아날 확률도 더 높아 보일 지경이었다.
‘이대로...이대로 저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음적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아!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그런데...어째서 저 놈 혼자지? 객잔에서 보았던 그 년은? 분명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끓어오르는 원독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던 제갈현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략이 어느 정도 구체화될 무렵, 그녀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혈의인들이 비담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저만치 보였다.
어림잡아 보아도 무시무시한 자들이 족히 50은 되어보였다. 제갈현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시봉세의 우두머리인 모용천을 나지막이 불렀다.
“모용 오라버니, 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좋은 생각?”
“네. 오라버니도 느끼셨을 테지만 우리의 깊은 원한을 저자에게 그대로 되갚아주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솔직히 실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요.”
“으음, 그래서?”
“그런데 꼭 본인에게 직접 되돌려 줄 필요가 있을까요? 막혀있는 길은 돌아가면 그 뿐. 제 품엔 지금 검황 어르신께서 주신 춘약과 미혼제가 있어요. 그걸 잘 이용하면 저자의 장(腸)을 갈가리 찢어 버릴 수 있을 거예요.”
“어허, 답답하니 속 시원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다오.”
“어제 객잔에서 보았던 그 년 생각나세요?”
“저 놈과 함께 밥을 먹던 여인 말이냐?”
“네, 맞아요. 오라버니도 짐작하셨겠지만 저 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행동을 보았을 때 보통 사이가 아님은 분명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그 년이 지금 없잖아요? 그럼 무엇을 뜻하겠어요?”
“객잔에 남아 저놈을 기다린다는 소리구나. 그럼 그 춘약과 미혼제로...?”
“호호호, 이제야 이해를 하셨네요. 저 음적놈에게 짓밟힌 제 몸과 마음...그대로 그년에게 되돌려줄 수만 있다면 이보다 짜릿한 복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객잔에 남아있다면 그 년이 마시는 음식이나 차에 미혼제와 춘약을 넣기도 수월할 터.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일을 치르기도 전에 저놈이 객잔으로 돌아와 발각된다면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텐데.”
“호호호, 그건 걱정 마세요. 우리를 대신해 저자의 발목을 잡아줄 지원군이 저기 달려오고 있으니까요.”
제갈현아의 눈길을 따라 모용천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도 저만치 날아갈 듯 달려오는 혈의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흐흐흐,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저 정도 인원이라면 충분히 저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겠군.”
“천운이 닿는다면 저 음적놈의 무덤은 이곳이 될 테고요. 뭐, 운이 좋아 살아난다고 하여도 사랑하는 이가 윤간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앞으로 맨 정신으로 살아가긴 힘들겠죠. 우릴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단단히 보여줘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거예요.”
“후후, 좋아 좋아. 아주 기막힌 계책이야. 그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며 낭비할 순 없지. 서둘러 객잔으로 출발한다.”
비담과 직접적인 원한이 없는 나머지 인원들은 윤간이라는 천인공노할 짓이 탐탁지 않았으나 시봉세의 실세인 모용천과 제갈현아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말릴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더불어 그들 역시 제갈현아와 남궁소미가 당했던 일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묵적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갈현아의 계략에 가장 신나하며 동조하는 이는 당연히 팽철영이었다.
비담은 사악한 음모가 진행되는지도 모른 채 여전히 혈의인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보아 진정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즐거움 가득한 그의 얼굴은 이내 와락 구겨지고 말았다.
바로 혈귀대 3조를 모두 처리하자 등장한 50여명의 혈의인들 때문이었다. 너무 싸움에 몰입한 나머지 그들이 다가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너무 싸움을 즐겼구나. 가만 저자가 대장인 것 같은데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 뭐 전력을 다해 일대일로 붙는다면 10여초 정도면 충분할 것 같지만 나머지 떨거지들이 귀찮고. 에라, 모르겠다. 우선 튀고 보자. 오욱이야 다시 데리러 오면 되니까 우선은 귀찮은 저것들부터 떨쳐 내버리자.’
비담은 생각이 끝나자마자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몸을 날렸다. 비담의 썩소에 분기탱천한 마영은 더욱 속도를 높여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얄밉게도 부하들이 몰살된 공터에 다다른 순간 놈이 몸을 날렸기에 마영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무조건 잡아라. 놓치면 련으로 복귀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 저자의 무공수위가 높으니 2개조씩 묶어 산개하여 포위하라. 나머지 1조는 나를 따라 이동한다.”
“복명!”
마영의 스산한 명령과 함께 혈귀대는 분분히 몸을 날렸고, 그 역시 핏발 선 눈으로 비담의 뒤를 맹추격하였다.
한편 객잔에 도착한 시봉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차가 나오는 동안 객잔 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으나 찾고자 하는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음,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제 그놈 옆에 있던 여인은 보이지 않는구나.”
“그러게요. 혹시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미 객잔을 떠난 건 아닐까요?”
“만약 이미 떠났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지.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알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네 말대로 조금 더 기다려보자.”
낙심한 기색이 역력한 모용천이었지만 그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기 싫었기에 조금 더 참고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고,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진 시봉세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커졌다.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이어지는 제갈현아의 전음.
‘모두 고개를 돌리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제갈현아의 다급한 전음에 일행은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태연한 척 가장하였다.
물론 바람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였기에 별다른 의심은 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찾은 모용천이 제갈현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제 그놈 옆에 있던 그년이 분명하구나. 어딜 다녀온 모양인데 아직 떠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우선은 저년이 음식이나 차를 주문할 때까지 기다려야죠. 그러다 주문을 하면 오라버니께서 점소이의 시선을 분산시켜주세요. 그 사이 제가 준비된 약을 음식이나 차에 넣을게요. 그리고 황보오라버니와 연매, 운과 철이는 혹시 모르니 지금 당장 그자가 올만한 길목들을 감시하다가 만에 하나 그자가 보이면 무조건 달려와 알려주시면 됩니다. 자, 시작하죠.’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 제갈현아는 침착한 눈빛으로 모두에게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