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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54)

120화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봉세가 자리를 뜨고 비담이 막 마음의 정리를 하자마자 의문의 혈의인들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정도맹의 잡졸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라. 화산파의 말코들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3조는 오욱을 맡아 제거하라.”

“복명!”

괴소를 날리며 등장한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10명의 혈의인들이 오욱이 있는 전각으로 몸을 날렸다.

오욱은 때 아닌 침입자들에 분기탱천하여 검을 뽑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침입자들의 무공은 분노만으로 제압하기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끝도 없이 나타나 휘젓고 다니는 자들 중 하나와 붙는다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10명이 한꺼번에 덤볐으니. 승부는 너무나 뻔했다.

순식간에 역전된 상황에 오욱은 뒷걸음질 치느라 바빴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밀린 오욱은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실력에 따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침입자들은 느긋하게 다가와 쓰러져있는 오욱에게 손을 내밀었다.

“멸사대의 비밀장부를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흐흐, 차라리 죽이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나를 고문해 보았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 괜히 헛수고 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시간낭비만 하였군. 모두 쓸어버릴 생각이니 어차피 비밀장부 따위 필요 없겠지. 그럼 잘 가거라.”

혈의인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대기를 갈랐고, 쓰러져 있던 오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욱은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부채가 혈의인의 검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웬 놈이냐?”

“하하, 실례 좀 합시다. 이 양반 나랑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저승가면 안 되거든. 나중에 일 끝나면 다시 보내드릴 테니 그 때에 마저 일 보쇼. 그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비담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리곤 오욱을 옆에 낀 채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놓치지 마라.”

발악하듯 소리치는 외침과 함께 혈의인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마침 근처에서 멸사대원들을 도륙하고 있던 혈귀대주 마영의 눈에도 그 장면이 포착되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축 늘어진 사내를 끼고 한 마리 비조처럼 날아가는 모습.

3조 조장이 급하게 쫓고 있었으나 경공 하나만으로도 달아나는 자의 무공수위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깐 스치듯 보았지만 도주하는 자의 경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사실.

‘매우 강한 놈이다. 만약 저것이 유인하는 것이라면 3조가 위험하다.’

“7조부터 9조까지는 이곳에 남아 쓰레기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방금 뛰쳐나간 녀석을 추격, 포위하여 제거한다.”

“복명!”

피에 흠뻑 젖어있던 50명의 혈귀들이 동시에 도약하였다.

목표는 하나, 자신들의 먹잇감을 중간에 가로 챈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오욱을 옆에 낀 비담은 방울이 흔들릴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마음 같아선 신나게 싸워보고 싶었지만 옆에 혹도 하나 달려 있었고, 무엇보다 서희의 걱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호승심을 채우고,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 지겹도록 부딪힐 사이이기에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희가 머무는 객잔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100명을 상대로 싸우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나 뒤따라오는 너희 10명 정도는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되지. 후후.’

전속력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비담은 주변을 관찰하며 여유만만이었다.

그러다 마침 적당한 공터가 나타나자 그곳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곤 추격하는 자들과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본 연후 적당한 거리를 더 달려 오욱을 내려놓고 바로 혈귀대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혈귀대 3조 조장 광막참 이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의문의 침입자가 도주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한지라 전속력으로 따라붙어도 놓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림에 그 누가 있어 우리를 이리 농락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사도련의 최정예 비밀무기인 우리 혈귀대를 말이다. 놈,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속도를 더욱 높인다.”

“복명!”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으나 하늘같은 조장의 명령.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담한 공터를 지나칠 무렵, 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개하라.”

“후후, 늦었어.”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부채.

그 부채를 둘러싼 푸른색 선강이 너무 아름다웠으나 그것을 감상할 여유 따윈 아예 없었다.

저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초대할 재앙이었으니까.

다급한 조장의 외침과 함께 조원들은 불에라도 데인 듯 화들짝 놀라 흩어졌으나 무정하게도 부채는 그들을 지나갔고, 세 명의 혈귀대원들 목이 둥실 떠오르고야 말았다.

부채는 유려한 곡선과 함께 저만치 서있던 비담의 손으로 다시 돌아갔다.

‘예상은 했지만...정말 엄청나구나. 그저 한 단계 더 올라섰다 여겼건만 위력은 수배가 강해졌어. 히야,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어. 잠깐이면 별 상관없을 거야. 야호, 너희들 지금이라도 참회하는 게 좋을 거야.’

비담은 신이 나 자신도 모르게 화류선법을 처음부터 모조리 펼쳤다.

흡사 양떼 사이로 뛰어든 늑대마냥 거칠 것이 전혀 없는 모습.

자신감 충만하다 못해 과잉된 상태로 무림에 첫 발을 내딛은 이수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이건 악몽이고...재앙이야.’

그가 멍 때리는 사이 속절없이 당하는 자신의 수하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어린아이 열 명이 어른 한명과 싸워도 저런 광경은 연출되지 않으리라. 이것은 싸움을 넘어 일방적인 구타요 학살일 뿐이었다.

비담은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음에도 자신도 모르는 흥에 취해 싸움을 즐기고 말았다. 물론 혈귀대원들에게는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악몽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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