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54)
  • 119화

    화산파에 도착한 비담이 오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흑막주 이성보로부터 그자의 인상착의와 정도맹에서의 위치, 신상명세에 대해 세세히 들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정체까지도.

    ‘정도맹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비밀결사대 성격의 조직, 멸사대(滅邪隊). 그리고 그 멸사대주의 오른팔인 오욱. 그렇다면 어째서 부흥상회의 돈을 중간에 갈취한 왕석기가 오욱에게 돈을 건네었을까? 혹시 왕석기 그자도 멸사대원인가? 아니야, 비밀결사대의 성격이라면 무공이 만만치 않을 터. 그리 쉽게 조석태에게 발각되어 고문당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단순히 행동대원일 수도 있겠어. 그만한 비밀조직을 운용하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 테고, 마침 사도련과 연관 있는 부흥상회의 돈이라면 일석이조일 테니까. 후후, 정말 형님 말대로 겉으로 드러난 무림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두다 무언가를 꽁꽁 숨기고 있는 복마전 같은 곳이야. 나중에 서희랑 알콩달콩 오붓하게 살려면 황제 그 영감탱이랑 사도련만은 반드시 손을 써야겠어.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비담은 오욱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한 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오욱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벗어났던 것이다.

    ‘옳거니. 물건이 도착했구나.’

    비담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희와 함께 오욱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오욱은 산보라도 나온 양 느긋하게 걸었는데 별달리 이상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걷던 오욱이 다시 화산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분명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중간에 그 어떤 돌발행동도 하지 않았기에 비담으로써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 어라? 그냥 산보나간 거였어? 분명 돈을 전달받으러 움직인 줄 알았건만. 에이, 좋다가 말았네.’

    가볍게 툴툴거린 비담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오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담이 전각의 지붕 위에 숨어 감시하기를 반 시진, 갑자기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은 일단의 무리들이 화산파가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훌쩍훌쩍 담을 넘어 숨어들었다.

    어림잡아도 족히 백여 명은 되어보였는데 아직은 비담과 서희가 숨어있는 전각과는 거리가 멀어 둘의 존재를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라? 이것들은 또 뭐지? 그런데 살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아까부터 피부를 찌르르 울리던 정제된 살기의 정체가 바로 이것들이었어. 화산파에 나 말고 또 손님이 방문한 것 같은데...그것도 불순한 목적의 불청객들이 이리도 많이 왔으니 어쩐다? 우선 서희부터 객잔으로 돌려보내야겠다. 괜히 눈먼 칼에 서희가 다치면 곤란하니까.’

    비담은 곧바로 서희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초대받지 않고 몰래 온 손님이 있는 것 같소. 이곳에 있으면 혹시 다칠지도 모르니 우선 객잔에 돌아가 기다리시오. 나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몸을 빼겠소.’

    ‘알았어요, 가가.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오셔야 해요. 알았죠?’

    ‘알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어제의 기연으로 무공이 한 단계 더 올라섰으니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당신을 두고 모험을 할 만큼 어리석은 내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음,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오.’

    ‘네, 그럼 조심하세요.’

    서희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비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이 남는다고 고집을 부려보았자 괜히 짐만 될 뿐이므로.

    서희가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담의 눈이 어느 순간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검후의 심득을 통해 한 단계 올라선 경지,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을까? 확인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미치겠구나. 아니지, 괜히 서희가 걱정할 수도 있으니 자중하는 편이 낫겠어. 우선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손을 써야지.’

    비담은 심호흡을 하여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잠시 눌렀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혈의를 입은 자들과 한바탕 어우러지고 그들의 정체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미래를 위해 참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저것들의 정체가 뭘까? 살기를 저 정도로 정제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수련으론 어림없는 일인데 저만한 숫자의 고수들을 키워낼 만한 단체...역시 사도련일 가능성이 농후해. 후후,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무슨 목적으로 화산파를 방문했는지 몰라도 일이 묘하게 틀어졌음에는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방문자들이 또 비담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것들은 또 웬일이야?’

    오욱이 머물고 있는 전각을 향해 어제 객잔에서 마주쳤던 시봉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비담의 눈이 이번엔 진한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한창 서류를 정리하며 업무에 열중하고 있던 오욱은 예기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래에 무림을 위진 시킨다는 오정회의 시봉세 아니시오. 내 오늘 찾아온다는 기별은 이미 받았으나 워낙 할 일이 많아 준비가 소홀했던 점 양해해 주시오. 자, 이쪽으로 앉으시오.”

    “무림후학 모용천이 오대협을 뵙습니다.”

    떨떠름한 손님의 방문에 오욱의 인상이 잠시 구겨졌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자리까지 권하였다.

    시봉세 일행 역시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린 후 오욱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매화나 감상하자고 찾아왔을 리는 만무하고...그래, 요즘 무림이 하도 뒤숭숭하여 오정회 역시 바쁠 터인데 한적한 화산까지 어인 일로 오신 게요?”

    “하하, 오대협 말씀처럼 한가하게 매화향기 음미하며 시나 읖조리면 좋으련만 구린내 풀풀 풍기는 무림이 그것을 허락하질 않는 군요.”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시궁창냄새에 비하면 그래도 매화향기를 가릴 정도의 구린내가 참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서로 바쁠 터 인사치레는 이정도로 하고,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오?”

    시궁창냄새라는 말에 팽철영이 발끈하며 일어나려는 것을 모용천이 제지하였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용천은 말로는 기선제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찾아온 용건을 꺼내었다.

    “음지에 숨어 칼을 가는 것까진 무림동도로써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사실 자기 밥그릇 지키겠다는 것을 말릴 명분도 없고요. 허나, 사람 사는 세상엔 기본적인 상도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걸 어기고 문란하게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앞으론 저희 밥그릇은 넘보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와 한다는 말이 고작 밥그릇 이야기요?”

    “밥그릇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엔 주의로 끝나지만 다음번엔 피를 봐야만 끝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후후, 알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 그만 물러들 가시오.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명백한 축객령.

    모용천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두말없이 일어나 포권을 한 후 전각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전각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시봉세가 왜 화산에 나타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후후, 오정회의 밥그릇에 손을 댈 정도로 멸사대가 급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저 양반 호감이 가네. 성격이 아주 깔끔하고 담백해.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것들한테 금세 숙이고 들어갈 정도라니. 정도맹의 숨겨진 발톱이라...생각보다 아프겠어.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저자는 꼭 구해야겠군. 그런데 가만, 아뿔싸! 사도련의 목적이 이거였구나. 멸사대 제거. 이 일을 어쩐담. 서희와 약속했는데...그래,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도와주자.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섣불리 나설 필요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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