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러길 한 식경.
점점 비담의 몸을 중심으로 세를 넓히며 휘돌던 기들이 빨려 들어가듯 그의 몸속으로 갈무리 되었다.
그리곤 비담의 눈이 번쩍 뜨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전보다 더 깊어지고 맑아진 눈빛.
‘정체되어 있던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구나. 검후님이 남기신 상승의 무리. 그것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무의 끝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최후의 심득이다. 그나저나 하단전이 배 이상 커지고, 내공의 흐름 역시 훨씬 부드러워졌어. 흐흐, 역시 사람은 사랑하고 베풀 줄 알아야 복을 받는다니까.’
비담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연을 만끽하며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서희를 발견하였다.
“응? 아차차. 이런...내가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이오?”
서희는 의혹 가득한 눈으로 더듬더듬 대답을 하였다.
“두...두 시진하고 조금 더요. 그....그런데 이게 무슨 기사인지 설명을 해주셔야...”
“아! 당신은 전혀 모르겠구려.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아! 예서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다시 그 창고로 갑시다.”
창고로 다시 가자는 비담의 말에 서희는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이내 치미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다시 아늑한 창고 안으로 들어온 비담은 건초더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희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런 다음 자신의 상단전에 머물고 있는 길천과 검후로 불렸던 전대고수 초하련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비사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서희는 부녀사이에 있었던 애달픈 속사정에 눈물을 흘렸고, 이내 어느 정도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 글귀들을 검후님이 남기셨다는 말씀이시죠?”
“맞소. 화류선의 설매풍류를 매화와 눈이 있는 곳에서 펼쳐야만 보이도록 안배를 해두셨던 것 같소.”
“하아! 슬프지만 너무 아름다워요. 아버님과의 추억을 선물하는 이에게 전하는 선물이라니.”
“선물이라...그럴 수도 있겠구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아 새기셨으니.”
“가가, 너무 슬프고 아름답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아요. 헤어지고, 만날 날을 기약하며 끝없이 기다리는 일. 저는 검후님처럼 그리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나 역시 못 견딜 것이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네, 가가.”
화류선에 깃든 비밀로 인해 더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된 서희와 비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것보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더 소중하였다.
그리고 비담은 상단전에서 조용히 울고 있을 길천에게도 마음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님, 이제 마음의 짐을 편히 내려놓으세요. 글 속에 녹아있는 검후님의 마음을 형님도 느끼셨잖아요. 형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그 소중했던 마음들을요. 그러니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그분을 놓아주세요.’
‘그래야겠지. 아니 이제는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담아, 고맙고......고맙다.’
‘별말씀을요. 저 역시 그분께 선물을 받았으니 제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비담은 길천에게 주어진 소중하고 애틋한 지금 순간을 방해하지 않고 싶었기에 조용히 의념을 접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을 넘어간 지 한참 후에야 비담은 서희와 함께 객잔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눈 속을 돌아다니고 여러 가지 일을 겪다보니 둘은 급격히 솟아오르는 허기에 들어오자마자 음식부터 주문하였다.
일각여삼추.
마침내 주문했던 음식들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하나 둘 탁자 위를 채웠다. 둘은 너무나 구수한 냄새에 이성 따위는 저만치 내팽개쳐 버리고 허겁지겁 식사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때마침 등장한 불청객들로 인해 그들의 우아했던(?) 식사 시간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객잔으로 막 들어서는 5남 2녀, 그중 한 여인과 눈이 마주친 비담이 하던 식사를 멈추고 싸늘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서희 역시 흠칫 놀라 젓가락질을 멈추었고, 이내 비담의 시선을 따라 막 들어서는 젊은 남녀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 역시 싸늘히 굳고 말았다.
‘오정회의 시봉세? 하필 여기서 만나다니.’
‘쩝, 호사다마라 했던가? 넓고 넓은 대륙 다 제쳐두고 하필 여기서 만날게 뭐람. 휴우, 이놈의 팔자 뭐가 순조롭게 진행되지를 않아요. 오늘 하루 참 깔끔하고 우아했었는데 저 잡것들 때문에 화룡점정을 못하네. 에이 빌어먹을 새끼들. 걸리적거리면...다 엎어 버린다.’
비담은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식사에 몰두했다. 알아서 조용히 사라져주기를 바란 채.
한편, 시봉세 일행 중 누구보다 먼저 비담의 존재를 알아챈 제갈현아는 눈에서 독기를 줄기줄기 내뿜었으나, 림에서 주어진 임무를 생각하며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다.
‘모용오라버니와 황보오라버니라면 당장 저 음적놈을 제거할 수 있겠으나 우선은 주어진 임무가 먼저니 참는 수밖에. 밖에 쌓인 눈만 아니라면 음적과 한 객잔에서 지낼 필요도 없을 터인데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제갈현아였다.
그런데 시봉세 일원 중 제갈현아만큼 눈에 독기를 품은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하북팽가의 소가주 헌원도 팽철영이었다.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오냐, 지난번 빚에 이자까지 셈해서 오늘 끝장을 보자. 내 오늘만을 위해 절치부심 세가에서 영약을 밥 먹듯 복용하고 무공을 연마하였으니 해볼 만 할 것이다. 정 힘들면 옆에 계신 형님들이 분명 도와주실 터.’
하지만 팽철영이 분노하여 막 튀어나가려는 순간 그를 제지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모용천이었다.
팽철영이 의아해하며 눈으로 질문을 던졌고,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흔들며 거듭 만류하는 모용천이었다.
허나 그 역시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결국 팽철영은 핏발선 모용천의 눈을 마주하곤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대형의 분노에 비하면 자신의 분노는 새발의 피였으니까.
일행을 어느 정도 추스른 모용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를 하였다.
비담은 껄끄럽긴 하였으나 감히 시봉세의 무력으로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내일부터는 오욱을 감시하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그 안에 시봉세는 알아서 사라지리라 여긴 것이다.
다행히 그날 밤, 시봉세와 비담 사이에는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비담은 껄끄러운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서희와 함께 아침 일찍 화산파로 길을 나섰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 피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