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54)

115화

한편 같은 시각.

극현도가 머물고 있는 사도련 본진의 대전 안.

태사의엔 예의 무심한 눈빛의 극현도가 나른하고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부흥상회는?”

“혈귀대 10명을 투입하여 이틀 전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후후, 감히 내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조석태의 죽음은 확인했느냐?”

“네.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좋아. 혈귀대의 상태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최상입니다. 더 이상 우려하셨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하하하, 드디어 내 염원에 한 발 더 다가서는구나.”

“감축드리옵니다.”

대전이 떠나가라 한참동안 앙천괴소를 터트리던 극현도의 웃음이 멎고, 어느새 본래의 신색을 되찾은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가만...정도맹 피라미새끼들의 꼬리가 잡혔다고?”

“네, 지금 화산에 머물고 있는 오욱이라는 자가 대외의 활동을 주도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남은 혈귀대 구십을 화산으로 보냈습니다.”

“흐흐흐, 행여 몸통이 놀라 숨을 수도 있으니 착오 없이 깃털들만 태워버리거라.”

“혈귀대의 손속이라면 착오 없이 마무리 할 것입니다.”

“믿음직스러운 비밀병기가 드디어 완성되었구나. 부흥상회를 정리한 혈귀들에게도 화산으로 이동하도록 명하여라. 그들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건...후후후, 뜨거운 피 뿐일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극현도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졌던 대전은 다시 잠잠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시각.

그림 같이 이어진 소나무 사이로 아담한 정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이 한참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딱!’

장고를 거듭하던 노인 하나가 흑돌을 내려놓는 순간 청아하고 경쾌한 소리가 정자 가득 퍼져나갔다.

“으흠! 이보게 청송. 한 수만 물려주시게.”

“허허허! 어제는 제가 그리 애걸복걸해도 물려주지 않으시더니 하루 만에 역전이 되고 말았군요. 그러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어제 림주께서 한 수 물려주셨으면 제 이리 매몰차게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청송이라 불린 노인이 눈보다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백돌을 쥐고 있던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판을 정리하였다.

뒤에 시립했던 시동들은 바둑판이 걷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두 노인에게 차를 올렸다.

한참 맛을 음미하던 그 때, 청송이라 불렸던 백의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림주, 시봉세 그 아이들로 되겠습니까?”

“청송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고 있소. 허나 정도맹과는 표면적으로 우호를 유지해야하기에 림 입장에서 직접 나설 수는 없다오. 그리고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닌 이상 약간의 마찰은 있겠으나 그 아이들이라면 무난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기는 하군요. 만에 하나 실수가 있더라도 혈기왕성한 후기지수들의 치기로 받아들여질 테니 수습하기도 수월하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어쩌면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허허, 림주님께서 어련히 알아 하셨겠습니까. 그저 노파심에 한 말씀 올렸습니다. 그나저나 정도맹 그자들 겉으론 공명정대함을 논하며 항상 뒤로 호박씨를 까는 군요.”

“아마도 날로 세를 불려가는 사도련과 우리 오정회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격차를 따라잡기엔...후후후. 차는 모름지기 따뜻할 때 마셔야 제 맛이 우러나오는 법이니 어서 드시게.”

림주라 불린 노인.

인자한 미소를 얼굴 가득 품고 있었으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마냥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겨우내 이어졌던 가뭄이 못마땅했는지 하늘에선 아기주먹만한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비담은 강아지마냥 깡충깡충 뛰는 서희와 함께 발길 닿는 대로 설경을 감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고불고불 이어진 산모퉁이를 돌아나가자 그들 눈앞에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다.

둘은 동시에 외마디 감탄성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

끝도 없이 이어진 매화들의 향연.

발그레한 아기의 뺨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매화들이 따스해 보이는 순백의 어머니 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듯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

둘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자연이 전하는 경이와 감동에 몸을 떨었다.

“저, 정말 아름다워요. 만약 천상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까요?”

“당신 말처럼 신선들이 노닌다는 선계의 풍경 같구려. 소복하게 쌓인 눈이 마치 구름처럼 보이니 우리 이럴게 아니라 저 위를 거닐어 봅시다.”

비담은 아직도 멍하니 경치에 빠져있던 서희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이내 매화 사이로 몸을 던졌다.

둘은 꽃 사이로 펼쳐진 하얀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거닐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이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한 둘이었다.

가끔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진심을 확인하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무겁고 진실했으니 그들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각인하듯 가슴에 담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어느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에 몸을 떨던 비담이 매화보다 붉은 서희의 입술을 덥석 머금었다.

서희 역시 기다렸다는 듯 살포시 눈을 감고 뜨거운 숨결로 가득한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둘을 감싸고 있던 주변의 풍광들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이제 세상엔 오직 둘만으로 가득 채워졌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았던 둘의 입술이 떨어진 후, 비담은 근처에 보이는 창고로 서희를 이끌었다.

농장을 관리하기 위한 창고였는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깥보다 훨씬 아늑하고 포근해 보였다.

비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한쪽에 쌓인 건초들을 발견하였고, 말없이 서희를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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