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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54)

114화

제 12 장 화류선(花流扇)에 깃든 비밀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확인한 후, 비담과 서희는 곧바로 청화루로 향했다. 괜히 시간을 지체했다가 돈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일이 고약하게 꼬여버릴 수 있었기에 서둘러 온 것이다.

청화루에 도착한 비담은 바로 소옥이라는 기녀를 찾았고, 왕석기의 품에서 꺼낸 물건의 증서를 제시하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뭐라고요? 벌써 보내셨다고요?”

“예, 소협. 그 물건은 부탁하신대로 화산파에 계시는 신기검(神奇劍) 오욱 대협께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언제입니까?”

“오늘 오후에 전달했습니다. 아마도 닷새 뒤에 원하시는 대로 오대협께 당도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물건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하여 그러는데 중간에 회수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저 역시 모릅니다. 점조직으로 구성된 연락책들에 의해 물건이 운송되는지라 한 번 제 손을 떠나면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저를 포함한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그동안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비책이지요.”

“정녕 중간에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비담은 단호한 기녀의 표정에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알아내거나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쉽지만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없지. 애석하지만 부흥상회의 일은 이쯤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그저 부흥상회라는 밥줄 하나 제거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군.’

“이만 돌아갑시다. 아쉽지만 그 돈은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나마 내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부흥상회의 재산들만 처분하고 빼돌려 사도련에 피해를 입히도록 합시다.”

비담이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

뭔가 골똘히 고민하던 서희가 비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가가?”

“말해보시오.”

“제 생각에는 그 돈을 회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소?”

“제 섭혼미염공에 홀렸던 조석태는 분명 돈을 제 때에 상납하지 않으면 부흥상회가 상계에서 지워질 것이라 했어요. 실수를 한 하부조직에 엄한 문책이 아닌 존재의 소멸이라면 둘의 관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어요?”

“단순한 하부조직이 아니라는 소리군. 그렇다면 상회가 사도련에게 무언가 꼬투리를 잡혔거나 약점이 잡혀 그동안 고분고분 그들의 뜻에 따랐다는 말인데...”

“맞아요. 그래야만 조석태 그자가 사도련의 눈을 피해 그만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이 이해가 되죠. 분명 사도련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마련하기위해 조심스럽게 자금을 모았을 거예요.”

“그럼 더욱 내막을 파헤치자는 것이오?”

“네, 가가. 당장 내일은 황금 만 냥만 준비하면 넘길 수 있잖아요? 그 돈은 흑막주님께 잠시 융통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급한 불은 그것으로 끄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상회가 돌아가도록 유지하면 될 거예요. 그럼 분명 조석태로 변한 매영언니에게 접근하는 자가 하나 둘 나타날 거예요. 시일이 걸리겠지만 사도련을 향해 조석태가 준비하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예상 외의 큰 타격을 련에 안겨줄 수도 있을 거예요.”

“하기야 치밀한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황금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모았다면 제법 날카로운 발톱을 준비하고 있었을 터. 그럼 비자금을 회수해 조석태의 계획을 도웁시다.”

“네, 가가.”

비담은 흑막의 안가로 찾아가 이와 같은 정황을 흑막주 이성보에게 이야기하였고, 이성보는 흔쾌히 황금 만 냥이라는 거금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매영에게도 차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앞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사흘 후.

비담과 서희는 화산 인근의 객잔에 머물며 물건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시간을 아끼며 달려온 보람이 있어 다행히 소옥이 말한 날짜보다 이틀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의 시간은 온전히 오욱을 감시하는데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하루의 여유가 더 있었기에 둘은 느긋하게 객잔에 앉아 차를 들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었다.

“막주님께 전서구가 날아왔다고요?”

“네, 흑막의 정보원 하나가 아침에 가져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오라버니께서 어제 흑막의 안가를 출발하셨다는 내용이에요. 막주님께서 우리가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리라 하신 모양인데 아무튼 오라버니 성격도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전할 말씀이 있어 오시는 걸 수도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립시다. 형님 성정을 감안할 때 아마도 내일 오후쯤이면 이곳에 도착하시겠군요.”

“치, 하나뿐인 여동생이 사랑하는 정인과 오붓하게 바람 좀 쐬겠다는데 그걸 못 참고 감시하러 오겠다는 저의가 뭐냐고요.”

“하하, 형님께서는 우리 사이를 이미 다 알고 계신데 무슨 감시를 하겠다고 불철주야 오시겠소. 그저 혼자 계시기 적적하니 우리에게 오시는 거겠지요.”

“아무튼요. 마음에 안 들어요. 흥!”

서희는 짐짓 토라진 듯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비담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희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 차 짧은 감탄의 탄성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아!”

“응?”

비담 역시 서희의 탄성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밖은 어느새 하얀 눈으로 수북하게 덮여가고 있었다.

객잔 2층에서 내려다보는 아기자기한 설경.

세상사 오욕을 덮어버리려는 듯 옹기종기 줄 서 있는 낮은 지붕들이 어느새 하얀 모자를 눌러 쓴 채 서로 인사를 나누는 듯 정겨워보였다.

“올 겨울 가뭄이 심해 눈 구경하기가 힘들더니 정말 펑펑 쏟아지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가가.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게 얼마만인지. 가가,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눈 구경해요. 네?”

“하하, 그럽시다.”

비담은 언제 토라졌냐는 듯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서희와 함께 하얗게 물든 바깥으로 성큼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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