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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54)
  • 113화

    왕석기가 섭혼미염공의 최면에 취해 정말로 곧이곧대로 대답한 것은 물론 나아가 비담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처음엔 왕석기의 뜬금없는 행동에 영문을 몰라 당황했던 비담은 곧 자신이 말하는 대로 그가 행한 것임을 알아채고 어휘선택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음을 스스로 반성하였다.

    ‘휴우,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이리 중요한 순간에도 상대의 속을 긁는 평상시의 말투가 튀어나올 줄이야.’

    “내가 잘못했으니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귀에 닿는 더러운 기분은 그냥 감수하고 넘어가마. 자, 그럼 다시 물을게. 그 돈, 지금 어디에 있을까?”

    “청...화..루의 소옥이라는 기녀에게...있습니다.”

    “헉! 뭐, 뭐야? 그럼 황금 십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모두 기녀 구멍에다 털어 넣었다고? 정말? 사실이라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설마...아니지? 그래, 분명 아닐 거야. 세상천지 어떤 미친놈이 여자랑 자겠다고 황금 십만 냥을 쓰겠냐고. 구룡포 뒤집어쓴 그 미친 영감이나 최음제 조제를 취미생활로 즐기는 남궁 늙은이도 그런 짓은 못해.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쟁쟁하게 미친 양반들 모두 너 같은 짓은 못해. 그런데 지금 기녀에게 황금 십만 냥을 줬다는 네 말을 정신이 가끔, 아주 가끔 미친 나보고 납득하라고? 자, 지금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충분히 감안하고, 이해해 줄 테니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줘. 정말 청화루에 있는 소옥이라는 기녀에게 황금 십만 냥을 줬어?”

    “네...며칠 전에...전달했습니다.”

    “으악! 정말 미치겠네. 야? 너 지금 내가 시간이 팽팽 남아돌아 너랑 장난치는 것 같냐? 고문당하는 네놈이 심심할까봐 말벗 해주러 온 거 같아? 얌마, 황금 십만 냥이면 기루를 백 개는 사고도 남을 돈이라고. 그런데 달랑 기녀 한 명에게 그런 거금을 줬다고? 그 여자 거기는 황금으로 반짝거리든? 아니면 가슴에서 불로장생의 묘약이라도 콸콸 솟아나는 거냐? 도대체 왜 준거야, 왜!!!”

    “그녀의 거기는...황금이 아닙니다. 가슴에서...불로장생의 묘약도...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그 소리가 아니잖아!!”

    “돈을 맡긴 이유는...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크억!!”

    “안전하긴 뭐가 안전하다는...가만. 뭐라고? 준 것이 아니라 맡긴 거라고? 야!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 보라고.”

    “이미 죽었어요, 가가.”

    “하필 중요한 순간에 죽어버리다니. 흠, 어쩔 수 없지. 청화루에 있다는 소옥이라는 기녀를 찾아가는 수밖에.”

    영양가 없는 말들로 시간을 질질 끄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듣지 못한 비담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사내를 지켜보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섭혼미염공이 풀려버린 서희를 데리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청화루를 향해 어느 정도 달렸을 무렵.

    서희가 갑자기 신영을 뚝 멈춰 세우더니 나즈막히 비담을 불렀다.

    “가가?”

    “응?”

    반사적으로 신형을 멈춘 비담이 서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비담을 부른 서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였다.

    비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하고 이내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이 곁에 왔음에도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하자 비담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가가, 선화 언니를 어찌 생각하세요?”

    “이소저? 갑자기 왜 그것을...”

    “그동안 매영언니가 옆에 있어 차마 여쭤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제고 용기를 내어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언니에 대한 가가의 마음을요.”

    “흠, 무슨 얘기를 들은 것이오?”

    “가가께서 황궁에 가셨을 때...선화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럼 모두 들었겠군요. 흐음, 변명하지 않겠소. 하지만 변함없는 진실, 그 하나만 믿어 주시오. 신은 나에게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뛸 수 있는 심장을...주셨을 뿐이라오.”

    “정말 다행이에요...그리고, 고마워요.”

    서희는 비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비에 젖은 새처럼 바들바들 품안에서 떨고 있는 서희. 그리고 젖어드는 비담의 앞섶. 비담은 행여 날아갈세라 서희를 더욱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앞으로 다시는 그대의 고운 눈에 이슬이 맺히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소. 사랑하오...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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