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반 시진 후.
잠들어 있는 조석태를 내려다보는 세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비담과 서희, 매영의 눈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비담은 곤히 잠들어 있는 조석태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깨웠다.
“으흐음, 헉! 누, 누구. 읍.”
자신의 숙면을 방해받은 것이 못내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구기던 조석태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지르려 하였으나 비담의 손이 입을 막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쉬잇!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새가슴이라 잘못하면 당신의 목에 위협용으로 대고 있는 비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거든. 그래,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으면 별 일 없을 테니 우리 쉽게 쉽게 하자고.”
자신의 목에서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빛나는 비수로 인해 조석태는 곧 반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별 거 없어. 그냥 네 몸뚱이랑 약간의 정보.”
“나를 납치하겠다는 것이냐?”
“아니. 우리는 그런 고단수의 범행을 저지를 정도의 배포는 없어서. 애석하지만 감금하는 선에서 끝내자고.”
“후후, 내 재산을 노렸나본데 너희는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 당할 성 싶으냐? 내 뒤에는...”
“당신 뒤에 뭐가 있는데?”
“가소로운 놈들. 내가 사라지면 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헉! 려, 련이라고...아뿔싸! 이럴 수가. 그런 무시무시한 단체가 뒤를 봐주고 있을 줄이야. 그런 대단하신 분인지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어설픈 협박을 하며 금품을 갈취하려던 못난 저희들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후후, 허나 이미 늦었...”
“헤헤, 이럴 줄 알았냐? 이런 걸 기대한 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그랬나보네. 그런데 어쩐다...”
말끝을 흐리며 비담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곳엔 이미 조석태의 모습으로 완벽히 변한 매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헉! 어, 어찌 이런 일이...”
“저런. 련에선 이런 거 안 가르쳐줬나 보네. 이리 완벽한 대역이 있는데 과연 당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까? 후후, 내기해도 좋아. 부흥상회는 아무 잡음 없이 잘 돌아갈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자, 그럼 제대로 시작해보자고.”
비담이 물러서자 서희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섭혼미염공을 시전 하였다.
서희의 눈이 보랏빛으로 진하게 물들수록 조석태의 동공은 빛을 일어가며 흐리멍덩하게 풀리고 말았다.
“다 됐어요.”
“좋아. 그럼 질문을 시작해보자고. 우선 련이라는 단체의 정체가 무엇이냐?”
“모릅니다.”
“모른다? 그런데 어찌 련이라는 단체를 언급했지?”
“정체를 알지는 못하나 매달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에 그리 대답했습니다.”
“정기적인 방문이 있었군. 좋아, 그럼 매달 찾아오는 그자와 어떤 일들이 있었나?”
“상회의 수입 중 비자금으로 조성된 자금을 매달 그자에게 상납하였습니다.”
“매달 마주하면서도 정체를 모르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매번 복면을 하고 있었고, 몸의 형태로 보았을 때 여러 명이 돌아가며 상회를 방문한 것으로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자와 접선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접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집무실 개인금고에 매달 일정량의 돈을 마련해두면 알아서 꺼내 갔습니다.”
“간단해서 좋구나.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다. 방금 인근 야산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에 다녀온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엔 무슨 일로 갔던 것이냐?”
“어떻게 알았는지 비자금을 관리하던 자가 저의 눈을 속이고 막대한 양의 자금을 빼돌렸습니다. 련의 눈을 피해 모아두었던 자금과 이번 달 련에 상납해야 될 돈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회수할 목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돈은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놈이 분명 어딘가로 돈을 빼돌렸는데 입을 열지 않고 버텼기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으흠! 만약 련에 돈을 상납하지 않으면 어찌 되느냐?”
“부흥상회는 상계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그럼 가장 가까이 닥친 상납일이 언제이고, 금액은 얼마이더냐?”
“매달 초하루에 찾아오고, 금액은 황금 10000냥입니다.”
이지가 상실된 조석태는 비담의 물음에 술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흐음, 황금 일만 냥이라...결코 적은 돈은 아니로군. 초하루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아무래도 창고에 있는 자가 숨겨둔 돈을 찾아야겠군.’
“후후, 유용한 정보 요긴하게 사용하마. 그럼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목숨만은 살려주지. 조금 누추하겠지만 흑막의 창고에서 지내며 그동안 련의 주구로 활동했던 것을 뉘우치며 여생을 보내도록.”
비담의 신호와 함께 서희가 섭혼미염공을 거두었고, 조석태는 허물어지듯 침상으로 쓰러졌다.
다음날 밤.
비담은 쓰러진 조석태를 처리한 후 서희와 함께 어젯밤 매영과 왔었던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내일이 련에 상납하는 날이었지만 서희의 섭혼미염공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창고에 도착하자 예의 건장한 사내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지만 비담의 화류선 한방에 모두 무기력하게 픽픽 쓰러졌고, 비담은 산보라도 나온 양 유유자적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에는 어젯밤 비명을 질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 남성이 피칠갑을 한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모진 고문 속에 군데군데 큰 상처들이 보였지만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 비담은 사내의 상태가 섭혼미염공을 견뎌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당장 황금 만 냥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부흥상회에 잠입한 의미가 없었기에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물론 주인의 돈을 중간에 가로챈 부도덕한 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부탁해.”
비담의 부탁과 함께 서희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그 순간 사내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자,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양반.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으흐음. 내 이름은 왕석기...입니다.”
“그래, 내 당신의 주인 되는 부흥상회의 조석태에게 자초지종은 모두 들었지. 도대체 상회의 돈을 얼마나 해먹은 거야?”
“화...황...금.....시, 십만...냥입니다.”
“와우! 통도 크셔라. 그게 모두 뱃속으로 들어가던가? 그 정도 액수면 탈이 나도 단단히 날 터인데. 흠, 그 두둑한 배짱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군. 뭐, 주인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 괘씸하기는 하나 그래도 내 일이 수월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눈감아주지. 그건 그렇고, 나 역시 그 돈이 꼭 필요해서 중간에 꿀꺽해야 될 것 같은데. 지금 황금 십만 냥이 어디에 있을까? 너무 궁금해 미치겠거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할 테니 이 귀에다 대고 시원하게 한번 불어봐.”
“도...돈은....먹지 않았기 때문에...지금 제 배...속에 없습니다.”
“응?”
“그...그리고 후우~”
쩝
왕석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비담은 망연자실 그대로 굳었다가 그만 울상이 되어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