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고맙습니다. 역시나 제 안목이 어긋나지 않았군요. 그럼 기꺼운 마음으로 머물겠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계약서를 작성한 후 배정된 숙소로 이동한 비담 일행은 차후의 일을 의논하였다.
“일단...잠입까지는 성공했고. 매영 당신은 추후 조석태의 역할을 대행할 것이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관찰하시오. 그의 습관이며 행동, 말투를 비롯해 세세한 부분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나중에 그를 대신해 부흥상회를 장악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저는 뭘 하면 되죠?”
“매영의 관찰이 끝나면 시행할 수 있도록 당신은 ‘미염경혼공’을 준비해 주시오. 련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보기 좋게 한 방 먹이려면 그자의 기억을 모조리 뽑아내야하니까.”
“알겠어요, 가가.”
“자,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테니 일종의 유희라 생각하고 즐깁시다. 그럼.”
비담이 밝게 웃으며 대화를 마쳤다. 매영과 서희가 각자 배정된 방으로 이동하고 혼자 남은 비담은 여러 가지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예전 석양을 등진 채 서희와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었던 호숫가를 거닐었다.
그렇게 비담이 혼자 추억을 곱씹으며 걷기를 일다경.
작은 인기척과 함께 살포시 뒤에서 그를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한데...”
“괜찮아요. 가가의 품이 이리 따뜻한 걸요.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왜 주무시지 않고...”
“하하, 어여쁜 당신이 이리 내 곁에 있으니 오려던 근심걱정도 모두 달아날 것이오. 그저 달콤하고 짜릿했던 옛 생각이 나서 이리 거닐었다오.”
“호호, 제가 따귀를 때렸던 그 일이 그리도 달콤하고 짜릿하셨어요?”
“에이, 그 정도 일로 달콤하고 짜릿했다 말할 수 있겠소? 물론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호수를 배경 삼아 그대의 입술을 훔치고 따귀를 맞은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기는 하나 그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련했던 그 여인의 거친 숨결과 보드랍던 살결...아담하지만 봉긋 솟은 가슴을 지나 매끄럽게 이어진 허리를...으윽!”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비담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은 서희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 저 말고 다른 여인을...도대체 누구죠?”
“하하, 오해하지 마시오. 당신이 소개시켜준 목(木)소저가 생각나 농을 던진 것이니.”
“목(木)소저요?”
“나뭇결이 곱게 살아 숨 쉬던 그녀 말이오.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호호호, 그녀를 깜박했군요. 이제야 생각났어요. 침상 위에서 목각인형을 붙들고 힘을 쓰시던 가가의 모습. 그런데 애석해서 어쩌죠? 그녀는 이미 가가를 버리고 멀리멀리 떠나버렸는데.”
“흐음, 그녀는 떠났으나 이리 내 옆에 남아준 그대가 있지 않소? 뭐 그녀보다 요만큼 매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하하하!”
“뭐예요?”
비담이 검지와 엄지를 조금 벌려 익살스럽게 들이대자 서희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허리에 척 손을 올린 채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담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뻐 보여 순간적으로 입을 맞추고 말았다.
“우읍! 가가...이러면 인피면구가. 흐음!”
다리에 힘이 풀린 서희가 입맞춤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비담의 허리를 안았고, 비담은 부드럽고 깊게 그녀를 맛보았다.
그렇게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비담의 입술이 떠나는 순간 서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비담 역시 옷고름 풀다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은 새신랑마냥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쩝, 인피면구만 아니었어도...휴우.”
“가가, 매영언니에게 부탁해서 역체변용술 꼭 배우고 말 거예요. 우리 조금만 참아요.”
기필코 배우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서희였다.
부흥상회에 잠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잔뜩 굳은 얼굴의 매영이 급하게 비담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오?”
“조석태의 행동을 관찰하던 중 매우 수상한 점을 발견해서 급한 마음에 찾아왔어요.”
“수상한 점?”
“네, 조금 전 그가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저 역시 잠을 청하러 막 이동하려는 찰나 흑의로 전신을 가린 사람이 그자의 침실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찜찜한 마음에 좀 더 기다렸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곧 흑의의 남성과 조석태가 함께 나오더군요. 그래서 몰래 뒤를 밟았는데 인근 야산의 허름한 창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제법 경계가 삼엄하여 확인만 하고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당신 말대로 뭔가 냄새가 나는구려...이럴게 아니라 그곳으로 함께 가봅시다.”
매영을 앞세운 비담이 인근 야산에 자리한 창고에 도착한 것은 일다경 후.
매영의 말대로 딱 보기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허름해 보이는 창고임에도 불구하고 지키는 이가 여럿 보였다.
비담이 그렇게 창고 주위를 지켜보며 숨어 있기를 일다경.
“으으음!!”
한껏 격앙되었으나 어딘가 억눌린 듯한 신음소리가 창고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신음소리. 무언가 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신음소리에 이어 들려온 스산한 음성.
분명 조석태의 것이었다.
“바른대로 고하지 않겠다? 오냐. 끝까지 버텨보아라. 너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직접 확인해 보마.”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반시진에 걸쳐 이어진 비명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멈춘 후 조석태가 걸어 나왔다.
“질긴 놈. 어디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보자. 아무도 들이지 말고 철저히 감시하거라.”
“예! 어르신.”
창고 주변을 지키던 이들이 조석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담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후 서둘러 매영과 함께 부흥상회로 돌아왔다.
“어찌할까요?”
“음, 아무래도 뭔가 있는데. 조석태를 관찰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소?”
“사흘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의 모사는 힘들겠으나 충분히 주변 사람들을 속일 정도는 되요.”
“그럼 일을 앞당기는 게 좋겠군요. 오늘 밤 당장 그자의 침실로 들어가죠. 나는 가서 서희를 데려올 테니 당신은 침실 주변을 정리해 주시오.”
“알았어요.”
매영의 신영이 꺼지듯 사라졌고, 비담 역시 서희를 데리러 급히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