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다음 날.
비담은 구인철과 함께 두 여인을 마차에 실은 채 백마사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초조함과 걱정, 분노로 인해 얼굴이 반쪽이 된 검황 남궁헌수가 이미 도착해 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헌수는 황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듯 여기저기 옷이 찢어진 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증손녀와 제갈현아의 안위가 걱정되어 갈아입을 정신도 없이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하! 무척 기대하였는데 이런 제 염원과는 달리 무사하셨네요. 겉모습만 봐서는 딱 오늘 내일 우화등선하게 생기셨는데 말이죠.”
비담이 손까지 흔들며 등장하자 검황의 미간이 내 천자를 그리며 꿈틀거렸다.
“현아와 소미는?”
“이 안에 무사히 있습니다.”
비담이 탕탕 마차의 짐칸을 두드렸다. 짐승들을 실어 나를 때 사용하는 짐칸이 있는 마차였기에 순간 검황의 얼굴이 확 구겨지며 노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네 이노옴!!!”
“아이고, 귀청이야. 뭘 삶아 자셨기에 그리 목청이 좋은지. 그러다 이 안에 들어있는 예쁜 짐승들 경기 일으키니 우리 살살 시작합시다.”
“이,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자자, 흥분 가라앉히세요. 어르신 나이엔 흥분하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것 모르세요? 그리 급 흥분하시면 뒷목 잡고 쓰러지십니다. 좋게 좋게 천천히 하자고요.”
“흐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원하는 건 여기 짐칸 안에 있는 무림(無林)이한테 다 말해 두었으니 나중에 차차 들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약소하나마 어르신이 마련한 귀하고 황홀한 약에 대한 보답으로 저 역시 잊지 못할 선물을 준비해 두었으니 댁에 가시거들랑 풀어보시고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무림(無林)? 무림? 네 이놈! 거기 서지 못할까?”
천천히 하자던 말과는 반대로 서둘러 제 할 말만 끝낸 비담이 구인철과 도주를 하였고, 낯선 별호를 주워 삼키던 남궁헌수가 서둘러 마차 짐칸의 천을 거두었다.
그 안에는 두 여인이 포박당한 채 잠들어 있었는데 틀림없는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였다.
불안한 마음에 남궁헌수는 완력으로 짐칸을 분해해버렸고, 두 여인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수혈이 눌려 잠들어 있었기에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내 잠식해 들어오는 분노.
그런데 분노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남궁헌수의 귓가로 저만치 멀어지는 비담으로부터 기다렸다는 듯 전음이 날아들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쫓아올 생각일랑은 일찌감치 접으쇼. 아주 구린내 풀풀 나는 오대세가의 치부들이 세상에 공개되는 걸 영감도 바라진 않을 테니. 참, 그리고 약 잘 듭디다. 영감 덕분에 절세미녀 둘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호사를 누렸지 뭐요. 그나저나 무슨 비법으로 조제했는지 몰라도 약발이 활활 터지다 못해 넘쳐흐르는 뜨거운 밤이었소. 나중에 둘에게 마저 들으면 무지 재미질 것이오. 아무튼 그러다 복상사 당할 소지가 다분하니 영감은 남용하지 말고 적당히 애용하길 권하는 바요. 무림말학의 가슴 절절한 마지막 충고였소. 그럼!’
비담의 전음으로 인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궁헌수가 쓰러져있는 두 여인에게 공허한 시선을 던지기 무섭게 엄청난 노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비~~~~~~~~~~~담!!! 네 이노옴! 결단코 네놈을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갈가리 찢어놓고야 말 것이다.”
식후 가볍게 차 한 잔을 마시듯 남궁헌수의 속을 뒤집어 놓은 비담은 곧바로 구인철과 헤어진 후 서희와 매영을 데리고 부흥상회를 찾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부흥상회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구나. 서희를 만난 일이 어제 일 마냥 또렷한데. 후후, 어찌 보면 이곳이 나에겐 성지라 해야 하나?’
옛일을 떠올리며 잠시 감상에 젖었던 비담이 곧 훌훌 털어내고 매영을 대동한 채 부흥상회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성일상단의 양대인이십니다.”
인피면구를 통해 수행원의 모습으로 바꾼 비담이 근엄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서있는 중년남성을 소개하였다.
물론 근엄한 모습의 중년 남성은 역체변용술로 모습을 바꾼 매영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여기 있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문지기는 예약된 명부를 통해 성일상단의 상단주가 방문할 것임을 확인한 후 일행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문지기를 따라 안쪽으로 이동하며 비담은 슬쩍 서희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눈이 초롱초롱해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모습이 비담과의 옛일을 추억함이 분명해 보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비담은 하인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던 서희를 향해 과장된 행동으로 입술을 내민 후 자신의 따귀를 살짝 때리며 눈이 멍하게 풀린 모습을 연출하였다.
서희는 비담의 행동에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뒤를 돌아보는 문지기로 인해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였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뒤로 돌렸던 문지기는 고개를 갸우뚱한 후 다시 일행을 안내하였고, 매영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웃음 짓고 있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를 끝낸 문지기가 돌아가고, 일행은 준비된 다과를 들며 조석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비워갈 무렵.
“하하하,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 법도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워낙 과중한 업무에 치이다보니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과장된 웃음과 함께 중년 남성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 양반이군.’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성일상단의 양승욱이라 합니다.”
“어떤 분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흥상회라는 조그마한 상단을 운영하는 조석태입니다.”
“하하하, 요즘 상단계에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부흥상회가 조그마한 상단이라 하시니 제가 너무 초라해 보이는 군요. 아무튼 무척 바쁘신 것 같으니 바로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용건을 단도직입적으로 꺼내겠다는 양승욱의 태도에 일견 놀라워하던 조석태가 이내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천운이 닿았는지 이번에 제가 감숙성 인근에서 대규모 금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자금이 생겼음에도 믿고 거래할 만한 곳을 찾기가 힘들더군요. 고민을 거듭하며 여러 상단들을 물색하던 중 자금의 규모나 거래량, 상단주의 인품까지 고려해본 결과 부흥상회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3년. 금광에서 나오는 모든 금을 부흥상회를 통해 거래하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흠. 양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금맥만을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자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의 성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 하더군요.”
“저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하, 따로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알다시피 저희처럼 중소 규모의 상단이 거래를 주도하기엔 금이라는 물건이 조금 위험하지 않습니까? 대신 대가는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릴 것이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거래를 하지요.”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한 조석태였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격이었으니 인간인 이상 그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신지?”
“오면서 상회 안을 둘러보니 인공으로 조성된 가산이며, 호수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 며칠 묵으며 구경을 하였으면 좋겠는데...”
“하하, 그렇게 하십시오. 따로 숙소를 내어드릴 테니 며칠이고 이곳에 머물며 즐기셔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