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빙루가 흑막의 안가를 떠난 날.
하루 종일 요양을 취한 비담은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곤 이내 검황을 만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안가 깊숙이 위치한 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흑막의 안가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창고 안.
두 여인이 포박당한 채 죽은 듯 누워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죽음보다 더한 상실감에 두 눈이 칙칙하게 꺼져 있었지만 그 미모만큼은 여전히 지하실 한쪽의 어둠을 밀어낼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담은 죽은 듯 누워있는 두 여인에게 다가가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황궁에 들락거려 이리 험한 꼴을 당하는지...쯧쯧.”
비담의 혀 차는 소리에 두 여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곤 이내 흘러나오는 표독스러운 빛. 장정 서너 명은 찜 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지독한 살기였다.
“이...간악한 음적. 우리를 이리 대하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감히...감히...”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는 남궁소미였다. 이미 하복부에서 찌르르 느껴지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몸에 어떤 만행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하지만 마지막 수치심에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였다.
제갈현아 역시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나 비담과 말을 섞는 것조차 수치라 여겼기에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다.
대신 줄기줄기 살기를 내뿜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간악한 음적? 내가 할 소리를 그리 넙죽 떠벌리면 곤란한데 말이야. 내가 볼 때는 간악한 음적은 내가 아니라 두 소저들 같은데. 내가 말이야, 천하를 주유한 경험이 일천하기는 해도 색공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거든. 헌데 그 정도로 지독한 최음제는 정녕 처음 경험해 봤다는 거지. 내 평생 그런 너저분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할 줄 알았는데 또 겪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검황 그 영감탱이가 최음제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아니 솔직히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고. 딱 겉모습만 봐서는 신선인데 말이야. 후후, 그나저나 나 역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그건 서로 간에 피차 없었던 일로 하자고. 너무 자기들만 피해자인양 그리 억울해 뒈질 것 같다는 표정은 짓지 말아줘. 그건 그렇고 이미 서로 간에 재미를 보고 셈을 끝낸 것 까지는 좋은데...”
비담이 말끝을 흐리자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불안한 듯 물었다.
“우릴 어쩔 셈이냐?”
“생각 같아선 그냥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 쳐 박아 두고 싶은데 늙은이랑 약속한 것도 있으니 넘겨는 줘야겠지. 그런데 셈을 따져보니 조금 손해란 말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억울하고 쪽이 팔려서 말이지. 내가 구룡포 뒤집어 쓴 영감 앞에서 춤을 추며 놀아난 것이 누구 때문이냐고...휴우, 좋아. 백 번 양보해서 이 나라 제일 높은 양반 앞에서 재롱 좀 떨었다고 치자.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여서 그 양반이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버렸지 뭐야. 일이 이처럼 피곤하게 돌아가는데 내가 뭐 성인군자도 아니고 응당 대가를 받아내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게슴츠레 웃는 비담으로 인해 두 여인은 오싹 소름이 돋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비담은 그녀들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으며 툴툴 웃고 말았다.
“후후, 꿈도 야무져라. 내가 너희들을 다시 덮쳐줄 거라 오해하는 거야? 물론 서운하고 아쉽겠지만 그런 기연은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한 번 만족한 것으로 끝내자고.”
“그럼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간단해. 황제가 미쳐 날뛰는 것은 당장 어쩔 수도 없거니와 중과부적이라 너희도 힘에 부칠 거야. 대신 련을 좀 손봐줬으면 좋겠어. 내가 예전에 받은 선물도 있고 하니 섭섭지 않게 대접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어?”
“싫다면?”
“싫어? 뭐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도 숨통이 좀 트여야 하니까 섬응탄인지 뭔지 하는 화탄의 출처와 사용내역, 물증들을 관에 찌르고 무림에 퍼트려 시간을 버는 수밖에. 아마 군침 흘리며 달라붙을 파리들이 꽤나 많을 거야. 그리고 보아하니 시봉세인지 뭔지 하는 후기지수 모임에 좋아 하는 사내들이 있다던데 그쪽에도 둘의 상태를 흘려줘야지. 물론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니까 다 포용하고 이해해줄 거야. 간악한 음적 운운하며 나를 잡아 죽이려 혈안이 되겠지만 둘의 미래는 어찌 될까? 과연 그들이 뒤집어 쓴 허울 좋은 가면이 너희들을 보듬어 준 채 끝까지 버틸까? 후후, 내기해도 좋아. 아마 겉으론 너희들을 이해하는 척 감싸겠지만 곧 시들해지고 말거야. 원래 덜 여문 사내들이란 그리 하고도 남으니까. 자, 대충 내 얘기는 여기까지인데 아직도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이, 이런 천인공노할 음적. 결단코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리도 사리분별이 엉망이니 그리 뒤통수나 얻어맞고 다니지. 쯧쯧,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용서란 당한 자가 하는 것이고, 넓은 아량을 베풀 정도의 힘을 가진 이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피해자는 나다. 그리고 너희들의 지금 꼬락서니처럼 잘나신 오정회 양반들이 다 덤벼도 날 어찌하진 못한다. 이제 대충 감이 잡히나? 용서란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지 너희처럼 꼼수나 부리는 잡것들이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
뭔가 항변의 말을 하려던 둘은 스산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비담으로 인해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마음 같아선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비담이었지만 바락바락 대들며 생을 마감하기엔 그녀들의 원한이 너무도 컸다.
‘두고 보자. 오늘의 치욕과 고통 모두 몇 갑절로 되돌려주마.’
“우리가 어찌하면 되느냐?”
서둘러 감정을 수습한 제갈현아가 감정이 배제된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식간에 감정을 제어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모습에 비담은 시들해진 표정을 지으며 기계적으로 설명하였다.
“뭐, 간단해. 너희들이 정면으로 사도련의 본진을 쳐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으나 그럼 셈이 어긋나겠지. 그래서 더도 말고 사도련 지부들만 들쑤셔주면 된다. 정확히 한 달간만 그리해 준다면 앞으로 이리 서로 얼굴 붉히며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또다시 나를 건드리면 장담할 순 없겠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제갈현아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나 우리 오정회에서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너희들 편할 대로. 단, 한 달간 그들의 이목을 붙잡지 못할 시엔 나 역시 너희들의 치부가 공개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아니, 직접 퍼트리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오정회의 역량을 무시하지 마라. 그 정도는 소리 소문 없이 해치울 수 있으니. 그건 그렇고 더 할 말이 남았느냐?”
“아니. 전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그만 꺼져줬으면 좋겠구나. 얼굴 마주하고 말을 섞기가 심히 역겨우니.”
‘그리 당하고도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니. 명문가라는 간판이 가진 양날의 검이지.’
고개를 모로 비트는 두 여인의 행동에 속으로 혀를 끌끌 찬 비담이 창고를 조용히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