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두 여인은 비담이 멍하니 서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신구들을 흔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저기...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머! 언제 오셨어요? 참, 가가. 이거 너무 예쁘죠? 태어나 이처럼 영롱한 빛을 뿌리는 보석은 난생 처음이랍니다.”
그제야 비담의 등장을 알아챈 서희가 자랑하듯 자신의 몸에 달린 장신구들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러움과 장탄식.
“글쎄 이 모든 게 오라버니께서 언니에게 선물하신 거래요. 그 구두쇠 오라버니께서 말이죠. 어려서부터 아끼고 아껴야 가문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부르짖던 그 오라버니가 말입니다. 제가 뭐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전 한 바퀴 돌면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장신구라도 감지덕지인데 그마저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제 팔자가 거기까지인 걸 어쩌겠어요. 뭐 부럽다는 말은 아니고요. 물론 사달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냥 이 애기들이 너무 예쁘다는 거죠. 물론 저는 가가의 사랑만 있으면 되니 이런 것 다 필요 없어요. 휴우.”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뱉는 서희.
그리고 그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비담.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장신구들을 매만지는 서희의 손길은 비담이 느꼈던 그 어떤 초식보다 정교하고 매서웠다.
마치 목욕재계하고 침상에 누워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마나님처럼.
‘무조건 사줘야한다. 당장.’
“하하, 형님께 이런 낭만이 있는지 몰랐네요. 그게 무어 어렵다고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쉽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나가서 사드릴 수 있답니다.”
“저, 정말이세요? 꺄악.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가가밖에 없어요.”
서희는 팔짝팔짝 뛰며 방안을 휘돌더니 급기야 비담에게 폭삭 안겨왔다.
비담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희로 인해 하루쯤 시장을 돌아다니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하였다.
물론 시장을 돌아다닌 지 반 시진 만에 결심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기에 지금 당장은 그 역시 서희의 모습에 동화되어 마냥 행복했다.
빙루 역시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였다.
한동안 비담의 품에서 즐거워하던 서희가 이내 다시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기쁨에 겨워 장신구를 품평하고 몸에 두르며 자랑하였고, 비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가는 얼굴로 그것들에 맞장구도 쳐주고 미사여구를 날리느라 밤은 그렇게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망각이란 큰 강에 구인철을 던져버린 채.
이제나 저제나 초조한 마음으로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구인철.
밤새 10년은 늙어버린 듯 얼굴이 초췌하였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이성보가 흠칫 놀라는 것을 시작으로 아침식사를 위해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들던 까망이들 역시 주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한마디씩 던지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5년 폐관에도 의연하시던 분이...”
“주군의 상태를 보니 어젯밤 거절당하신 게 분명해. 하기야 평생 검만 알던 분이니.”
“주군, 힘내십시오.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면 오십 번이고 백 번이고 찍으시면 되잖습니까? 저희 흑천대의 최고 자랑거리가 우직한 뚝심이니 언제고 빙소저께서도 주군의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구일철은 퀭해진 눈을 들어 위로랍시고 던지는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리곤 이내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깨가 축 쳐진 구인철을 위로하려던 흑천대원들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구인철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는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었으니.
비담 역시 밤새 시달렸는지 눈이 멍하게 풀린 채 식당으로 내려왔다. 자신의 눈에는 모두 똑같아 보이는 장신구였건만 세세하게 품평을 요구하는 두 여인들의 등쌀에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흡사 면경을 들여다보듯 자신과 똑같은 몰골의 구인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헙!! 혀, 형님...’
비담은 간밤 엄청난 심력을 소모했는지 폭삭 늙어버린 구인철의 모습을 대하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뿔싸! 빙소저의 마음을 떠보겠다며 찾아간 서희와 내가 장신구 품평이나 늘어놓는 동안 밤새 애를 태우며 기다리셨구나. 이 일을 어쩐다.’
축 쳐진 어깨로 먼 허공을 응시하는 구인철에게 쭈뼛쭈뼛 다가간 비담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혀, 형님. 괜찮으십니까?”
“......”
“소제가 그만 형님께 죽을죄를 지었군요. 그리 자신만만 큰 소리를 쳤으니 밤새 얼마나 기대하며 기다리셨는지 눈에 훤하네요. 모두가 부덕한 소제의 탓입니다.”
“매제?”
“네? 예, 형님.”
“그녀가 거절하던가?”
“아, 아닙니다. 사, 사실은...”
“망설이지 말고 말해주게.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단단히 해두었네.”
“휴우. 사실은 그게 말도 꺼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 구인철이 서둘러 대답을 재촉했다.
자신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어 거절했다 여기며 밤새 자포자기 하고 있었는데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비담의 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막 비담이 내막을 설명하려던 찰나.
“호호호.”
“헤헤헤.”
빙루와 서희가 짜랑짜랑한 교소를 터트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비담은 그녀들의 몸에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을 보며 곧바로 헛구역질을 하였고, 영문을 알 리 없는 구인철은 안쓰러운 눈으로 비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자네 괜찮은가?”
“혀, 형님. 저, 저 물건들 때문에...”
비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두 여인을 가리켰고, 구인철은 의아한 눈으로 두 여인과 비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물건들 때문이라니...설마 빙 소저와 내 누이를 지칭하는 것인가?”
“우웩! 그것이 아니오라 몸에 주렁주렁 걸친 저 물건들 말입니다.”
“허허, 알아듣게 설명을 하게.”
“몸에 달린 저 장신구들 말입니다. 어제 형님 이야기를 꺼내러 갔다가 저 물건들만 밤새 구경하며 시달렸더니 저도 모르게...”
“그럼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것이...흠!”
밤사이 벌어졌을 만행을 짐작했음인지 구인철이 오히려 측은한 눈빛으로 비담을 위로하였다.
구인철 역시 빙루와 함께 시장을 돌며 수없이 겪었던 일이기에 밤새 곱절로 시달렸을 비담의 처지가 눈에 선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의 장신구 때문임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서희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비담을 간호하겠다며 난리를 부렸고, 그럴수록 눈앞에서 흔들리는 장신구들로 인해 비담의 눈은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때 아닌 소동으로 아침은 유야무야 지나갔고, 흑천대와 빙루 역시 심심한 위로의 말을 남긴 채 흑천맹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구인철의 염원은 훗날을 기약하며 저 멀리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