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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54)

107화

“후후, 제가 그리 무모해 보이십니까? 제 뒤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 그게 대체 누군가?”

“이번에 황궁에서도 손발을 같이 맞춰보았던 오정회와 황궁의 무사들이지요. 여기 계신 루주님 덕분에 오정회의 약점도 꽉 잡고 있겠다 더불어 훌륭한 인질까지 있으니 이제 협상과 함께 미끼를 던져야지요. 그네들 스스로 사도련의 본진으로 뛰어 들어가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오정회의 세력만으론 사도련의 본진을 치기엔 역부족일 테니 황궁 무사들의 힘을 빌릴 생각입니다. 황제에게 앙심을 품은 제가 오정회와 사도련 측 인물들과 자주 회합을 갖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동창 그 양반들 머리가 복잡해질 것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황제를 속일 수는 없겠으나 확인은 필요할 터이니 사도련과 오정회의 지부들을 들쑤셔 놓겠지요. 그럼 오정회 측에는 이와 같은 정황을 미리 흘려주어 피해가 없게끔 만들어주고, 사도련 측은 고스란히 피해를 입도록 만들어야 되겠지요. 그 일은 막주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가급적 황궁무사들과 사도련의 무사들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사도련의 지부들을 간추려 주시면 됩니다. 물론 자금이 많이 소요되겠지만 부흥상회의 일이 처리 되면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일을 추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부터의 관건은 시간 싸움이 될 테니까요.”

“그 일이라면 제 전공이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럼 지금 당장 사도련 지부들의 현황에 대해 파악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형님께서도 다시 한 번 맹에 다녀와 주십시오.”

“알았네. 아버님께 모든 정황을 설명 드리고, 자네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지.”

“혹시 장인어른께서 거절하시면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니 서둘러 전서구를 띄워주십시오.”

“그럼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떠나야 되겠구먼.”

“아닙니다. 이틀 후 검황 그 늙은이와 백마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저와 함께 인질로 잡혀 있는 두 여인을 데리고 함께 가시지요. 그곳에서의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떠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계획이 시작되면 이곳 역시 위험해질 수 있으니 빙소저는 까망이들과 함께 내일 맹으로 보내십시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소저를 위해선 그게 제일 안전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군. 나 역시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네.”

“막주님 역시 가급적 은신처를 여러 곳에 두십시오. 만에 하나 저들의 이목에 걸리면 당장 중단하시고 숨으셔야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번 남궁세가에서처럼 저돌적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상잔을 통해 저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니 위험하다 싶으면 꼬리를 자르셔야 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괜한 일에 형님과 막주님을 끌어들인 것은 아닌지 죄송하네요. 허나 이번 황궁에서의 일을 겪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통일이 아니더군요. 황제 역시 여태껏 숨겨놓은 시커먼 속내를 드러냈고, 오정회도 독자적으로 무림을 도모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련 역시 이번에 당하기는 하였지만 황궁까지 넘볼 정도라면 그들의 자금과 세력이 포화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들 세력들을 서로 상잔시켜 놓지 않으면 언젠간 정도맹과 흑천맹은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입니다. 당한 것을 생각하면 황제고 황궁이고 속 편하게 모두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지만, 죄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이제야 안정된 제국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물 좀 먹이는 선에서 끝내야지요. 그런 다음 더 이상 무림을 넘보지 않겠다는 약조문서를 받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사도련과 오정회는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 정도의 타격을 줄 생각입니다.

물론 저의 계략대로 그들이 움직이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자신들의 넘쳐나는 세를 믿고 자만한 상태이니 성공할 가능성도 높은 게 사실입니다. 맥 놓고 앉아있다 당하는 것보다는 저희들이 먼저 선수를 쳐 어떻게든 소중한 무림을 지키고 싶습니다.

“음, 이야기를 듣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지는군.”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나 잘 준비하면 제대로 한방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같은 무림의 세력들끼리 다툼을 벌여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간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한 일.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 황제의 세력에도 타격을 주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심각했던 회의가 그렇게 마무리된 후 자리에서 일어난 비담은 따로 구인철과 독대를 하였다.

“참, 제가 황궁에 가있는 동안 빙소저와 진도는 나가셨어요?”

“흠흠, 시간이 하도 촉박하여...”

“이런. 그럼 빙소저는 형님의 이런 애틋한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겠네요. 소저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형님의 마음부터 내보여야 되겠어요. 이제 내일이면 맹으로 떠나실 텐데...안 되겠어요. 서희랑 제가 나서야 진도가 나가겠네요. 오늘 서희를 통해 소저의 마음을 떠보고 형님에 대한 연정이 있는지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만약 빙소저에게 형님에 대한 마음이 있다면 오늘밖에는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는 수밖에요.”

“그, 그래도 갑자기 그러면...”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랍니다. 형님은 잠자코 계세요. 그냥 확인만 해보려는 것이니 부담 느끼지도 마시고요. 아마도 서희가 직접 나서준다면 한결 수월하게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만에 하나 형님에 대한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마음을 얻을 때까지 노력하는 수밖에요.”

걱정이 태산 같았던 구인철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랐고, 비담의 눈동자는 결연한 의지로 빛났다.

비담에게 그간의 이야기와 제반사정을 전해들은 서희는 흔쾌히 수락하였고, 곧바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똑똑

“누구세요?”

“저예요, 언니. 들어가도 괜찮아요?”

“어서 와, 동생.”

빙루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서희를 맞이하였다. 비담이 황궁에 가있는 동안 시름에 잠겨 있는 서희를 위로하며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한 둘이었고, 선화를 포함 셋이서 전투적인 수다를 통해 서로의 친목을 다져놓기도 하였다.

“이야, 이게 다 뭐예요? 무슨 짐이 이리도 많아요?”

“호호, 그러게. 난 별로 사지도 않았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꽤 많네.”

까망이들이 들었으면 입에 거품 물었을 소리를 너무도 태연히 내뱉는 빙루였다. 그동안 노심초사 빙루를 지켜왔던 까망이들 입장에서 저 물건들은 그저 재앙덩어리 자체였다.

“이야! 빛깔이 너무 고와요. 어때요? 저한테 잘 어울려요?”

황홀하게 빛나는 장신구에 정신이 팔린 서희는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도 잊은 채 이것저것 구경하고 착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호, 너무 잘 어울려. 그러지 말고 이것도 한 번 차봐. 머리모양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헤헤, 어때요? 저 예뻐요?”

“호호, 예뻐. 예뻐도 너~무 예뻐.”

나비문양이 조각된 비녀를 찬 서희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고, 방안은 두 여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기를 한 시진.

이제나 저제나 서희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비담은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한 시진이면 구인철에 대한 빙루의 마음을 떠보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감감 무소식이니 뭔가 일이 틀어졌다 오해를 한 것이다.

‘혹시 빙소저는 형님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괜히 섣부른 짓을 벌인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구나. 그나저나 나만 믿고 기다리라 인철 형님께 큰소리 뻥뻥 쳤는데. 아니지. 만에 하나 다른 속사정이 있을 지도 모르니 여기서 전전긍긍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낫겠어. 아직도 서희가 빙소저의 마음을 떠보는 중이라면 한 팔 거드는 것이 나을 거야.’

점점 깊어지는 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애만 태우던 비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곤 조심조심 빙루가 머물고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하여 안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방안에선 익히 예상했던 소리가 아닌 두 여인의 즐거운 비명과 탄성만 쏟아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일이 잘 성사된 것인가? 가만...그런데 이 엄습하는 불길함은 대체 뭐지. 아니야. 저리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일이 잘 성사되었음이야.’

“흠흠, 빙소저? 저 비담입니다.”

헛기침까지 하며 자신이 왔음을 알렸으나 방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비담이 살포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벌어진 아찔한 광경.

흡사 별이라도 뿌려 놓은 듯 방안을 가득 채운 휘황찬란한 빛에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한 물건인지 몰라도 방안에는 촛불에 반사된 수백 개의 구슬들이 두 여인의 몸을 감싼 채 둥둥 떠다녔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이기어검으로 날아든 구인철의 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비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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