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쯧쯧, 무능력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리 완벽한 함정을 파놓고도 쥐새끼 하나 제대로 옭아매지 못하다니. 놈의 재주로 미루었을 때 다시 잡기엔 희생이 만만치 않을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어라. 이번 황궁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경거망동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남궁세가를 비롯한 오정회와 사도련은 어찌 처리할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놈들 역시 그냥 내버려 두어라. 승상과 관리들을 쳐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응당 그 정도 허물은 덮어줘야지. 그리고 훗날 요긴하게 써먹기 위해서라도 아직 싹을 잘라버리기엔 이르지. 참, 이황자의 상태는?”
“조금 놀라기는 하셨으나 크게 상한 데는 없사옵니다.”
“하하하, 이번 무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녀석이니 푸짐한 상을 내려야 되겠구나. 세상의 이목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 이르고, 국경으로 떠나기 전, 태자와 함께 비밀리에 들라하라. 역모라는 더러운 누명도 마다하지 않은 녀석이니 정말 큰 상을 내려줘야지. 그만 물러들 가거라.”
황제의 호탕한 웃음 속에 깃든 칼날에 혹여 목이 달아날까 소름이 오싹 돋은 둘은 정중히 절을 올림과 동시에 서둘러 대전에서 물러났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은 정말 무섭도록 비정하고 치밀한 분이라는 사실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 둘이었다.
떠들썩했던 황궁에서의 사건이 마무리된 지 사흘 후.
추살대를 따돌린 비담이 드디어 낙양에 도착하였다. 옷 위 여기저기 먼지가 내려앉고 몰골 역시 말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담은 아직 황제가 어찌 나올는지 예측할 수 없어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이성보가 있는 흑막의 안가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안가에서 그토록 오매불망 마음속에 그리던 서희를 만나게 되자 눈물이 울컥 솟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보, 보고 싶었소.”
“흐흑, 상공.”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서희가 한달음에 달려와 비담의 품에 안겨왔다. 비담은 행여 부서질세라 자신의 품에 안긴 서희를 조심스럽게 안으면서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두 팔을 풀지 않았다.
비담의 앞섶을 흥건히 적시고 나서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밝게 미소 지으며 떨어지는 서희였다.
구인철을 비롯해 이성보와 선화, 매영, 빙루, 까망이들은 둘의 상봉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서희와 함께 지내며 둘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선화는 진심으로 둘의 상봉을 축하해주었고, 매영은 조금은 볼멘 표정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하, 회포를 푸는 것도 좋지만 그만 들어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비록 안가라고는 하나 주위의 이목이 걱정됩니다.”
안가 주위를 면밀히 살피던 이성보가 비담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제야 안부를 묻는 비담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건강을 많이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황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형님과 흑막주님 덕분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그토록 위험천만한 곳에 혼자 가셔서 모두의 애를 태우게 하셨으니 벌주 세 잔은 마셔야 됩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우선은 안에 들어가 허기를 달래신 연후에 술 한 잔 나누시지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한달음에 달려오다 보니 목이 많이 칼칼하네요. 동이 째로 가져다 놓으셔도 사양치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혹여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 걱정을 하며 밤에 잠도 이루지 못했는지 아는가? 난 벌주 석 잔에 만족하지 못하니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야.”
“하하, 맞습니다. 밤마다 대주님께서 안절부절 침상 주의를 서성이며 잠을 못 이루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정인을 기다리는 서희아가씨보다 더 하셨으면 더 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그 애틋함이란...서희 아가씨께서도 강력한 연적의 등장으로 인해 긴장하심이...”
“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사람 농을 해도...흠흠, 하나뿐인 여동생이 생과부가 될까 걱정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제발 그런 야릇하고 이상한 표정은 집어치우지 못 하겠는가?”
“수줍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꽁꽁 숨기셔도 이미 들통 나셨는걸요?”
“허어, 그게 아니래도 그러네. 어라? 다들 표정들이 왜...?”
“호호호, 그만들 놀리세요. 그러다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그리고 정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상공을 보내드릴게요.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오라버니라면 감수하고 참아낼 수 있사와요. 흑흑.”
“서, 서희 너마저...”
“하하하, 호호호.”
“하하. 죄송합니다, 대주님. 더 이상 농을 던졌다간 가늘고 길게 살자는 제 소박한 소원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 그만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리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고맙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지. 형님도 그러다 얼굴 터지시겠어요. 그만 눈에 힘 푸시고 들어가시죠.”
구인철이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연출하며 겁을 주었으나 금방 왁자지껄 웃음바다가 되었고, 그 역시 모두를 따라 함께 웃고 말았다.
비담 역시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걱정해준 모두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마운 사람들...그리고 내 사랑...’
흑막주 이성보는 비담의 생환을 축하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들을 장만하였고, 그렇게 안가에 모인 사람들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만찬을 즐겼다.
술 역시 거나하게 취해 흥겨운 분위기는 밤새 이어졌다. 비담은 이제나저제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서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고, 서희 역시 안절부절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당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 때, 눈치 빠른 이성보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거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온 비 공자님과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만 우선은 몸을 추스르도록 양보를 해야 되겠지요. 참,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가의 규모가 제법 됩니다.
빈 방도 아직 여러 개 남았으니 마음에 드시는 방을 골라 사용하십시오.”
고마움이 듬뿍 담긴 눈으로 사의를 표하는 비담이었다.
흑막주 역시 눈을 찡긋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눈치 없는 구인철이 이런 둘의 속내도 모르고 어깃장을 놓고 말았다.
“허허, 이제 시작인데 벌써 자리를 정리하시면 안 되지요. 저는 날이 샐 때까지 이 친구랑 술을 마실 겁니다. 아무도 말리지 마십시오.”
“하하하, 저희 대주님이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공자님께서 살아 돌아오셔서 기꺼운 마음에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주님은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눈치 없게 왜 그러십니까?”
“엥? 눈치? 사나이들끼리 뜨거운 마음과 의리를 나누겠다는데...그런 멋도 모르는 자네들이 진정 사내라 할 수 있는가? 딸꾹!”
“휴우, 이해해주십시오. 저희 대주님이 평상시엔 안 그러시는데...이상하게 마음을 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돌변하시니.”
얼큰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구인철이 한사코 뿌리쳤으나 까망이들은 거의 반 강제로 들쳐 업다시피 그를 데리고 나갔고,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럼 편안하고 좋은 밤 보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막주 이성보가 한사코 자리를 뜨지 않고 비비적거리는 매영을 대동하고 나가자 이제 식당에는 비담과 서희만 남게 되었다.
비담은 그윽한 눈으로 서희를 바라보았고, 서희는 그런 비담의 시선이 부끄러운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 애꿎은 자신의 옷만 만지작거렸다.
“하하, 제대로 첫날밤을 치르는 것은 오늘이 되겠군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대는 모를 것이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대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대를 다시 못 보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오. 사랑하오, 서희.”
비담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보이며 서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비담을 바라보는 서희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서희 역시 진심을 담아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비담의 품에 살포시 안겨왔다.
“사랑해요, 상공. 저 역시 그날 이후 한시도 상공을 잊은 적 없었어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상공의 품에 안긴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니겠지요? 만약 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을 거예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서희가 더욱 강하게 비담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