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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54)
  • 101화

    비담은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황자를 향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럼 다음으로 권력의 떡고물 좀 주워 먹겠다고 제 무덤인지도 모르고 기어 들어온 우리 정파 나부랭이들. 뭐 태자마마가 이미 빠져나갔으니 끈 떨어진 연이겠으나 그래도 소개를 안 하면 섭섭해 하겠죠. 어디 계십니까? 오정회에서 나온 검황 이하 그 나부랭이들...? 아 저기 계셨군요. 하도 주도면밀하게 변복을 하고 숨어계셔서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했네요. 자 나서서 인사 한마디 하시죠?”

    “비 공자...자네가 설마...우릴 배신하겠단 뜻인가?”

    “후후, 배신이라뇨. 그리 말하면 듣는 배신자 섭섭합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용해 먹으려던 것은 그쪽이었으니까 주거니 받거니 이제 비긴 겁니다.

    자, 이제 통성명도 끝났으니 거룩하신 황제폐하의 명을 받자와 정리를 할 것이니 마지막 유언들 남기십시오. 물론 그놈의 잘난 피 덕분에 이황자님은 열외니 한쪽으로 빠질 기회를 드리죠. 뭐 아랫것들이랑 운명을 같이 하네 어쩌네 하시면 저도 말릴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하셔도 무방하나 이왕이면 기회가 있을 때 빠지시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평생을 지내셔야 되겠지만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말처럼 기회가 있을 때 잡으십시오. 정확히 셋을 세겠으니 결정하십시오. 그 뒤엔 눈먼 화살세례만 퍼부어질 것이니...” 

    “후후후, 저런 화살 나부랭이로 우리를 어찌 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저런 화살 나부랭이론 감히 여러분들을 어찌 할 수 없죠. 하지만 무기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결정되는 법. 동창과 금의위에서 가리고 가려 뽑은 고수들이 아낌없이 내공까지 주입하여 날릴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참, 그리고 연노라는 걸작품이라 무서운 속도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퍼부어질 것이니 눈먼 화살들 알아서 피하십시오.”

    “동창과 금의위라...그럼 모두 알고 계셨단 말인데. 후후, 노망나고 이빨 빠진 뒷방 늙은이인줄 알았더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군.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뭐라 구시렁거리는지 잘 안 들리네요. 좀 크게 말씀하시던지 아님 그냥 좀 닫아주세요. 참, 그리고 도성을 향해 다가오던 군졸들은 바쁜 일이 있어 다시 국경지역으로 돌아갔으니 참고하시고요.”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승상, 어찌 된 일이오? 승상과 내가 비밀리에 준비한 사병들이 다시 돌아가다니...”

    승상 후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와 사병들을 잠시 물리고, 거삿날을 뒤로 미루자 했던 것은 이황자 주성은이었다.

    국경 쪽 병사들이 자신들의 뒤를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으니 그쪽부터 막자 하였던 게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이황자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다.

    “다, 당연히 이황자님의 분부대로 사병을 뒤로 물리지 않았습니까? 국경 쪽의 움직임이 다급하다며 거사를 잠시 미루자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이황자님이십니다. 저희들이 극구 말렸으나 바득바득 우기시지 않았습니까?”

    “제, 제가 말입니까? 전 승상을 찾아간 일도 병사들을 뒤로 물리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럼 오늘 이리 당한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을 거사일로 잡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황자님의 분부에 따른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내 행세를 하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저희들도 이만한 큰일을 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였사옵니다. 틀림없는 이황자님이셨습니다. 암호도 한 치 어긋남이 없었고, 행동이나 말투, 억양과 버릇까지 모두 틀림없는 이황자마마셨습니다.”

    “과인은 찾아간 일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거참 시끄럽네. 내가 시켜서 찾아간 거야. 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같은 편끼리 그리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싸우는지. 내가 미리 보낸 선물이야. 변장이라면 대륙 최고인 기인을 알고 있거든. 깜박 속아 넘어갔으니 그만들 좀 싸우라고. 그럼 셋을 세요. 하나! 둘!...”

    “잠깐. 그럼 련의 인물들이 모두 모인 것 역시...너의 짓이냐?”

    “당연하죠. 저기 승상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가관이네요. 참 이상했을 거예요. 거사를 미루잔 양반이 뜬금없이 전 무사들을 연회장에 집결시키라 하였으니. 조금만 생각하면 앞뒤도 맞지 않고 참 희한하고 이상한 일인데 전혀 의심 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꼴이라니. 정말 권력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안 보이나 봐요. 이 무대를 내어준 것은 황제이나 직접 연출하고 마무리할 사람은 나니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면 시작하죠. 셋! 어라? 전 기회를 드렸는데 안 피하시네요. 역시 대가리라 의리가 태산을 넘나들 정도로 크시네요. 그럼 이제 작별의 시간이니 남은 할 말이나 석별의 인사는 저승 가는 길에 천천히 나누시도록.”

    “잠깐!”

    손가락을 튕기려던 비담은 다급하게 들려온 외침에 잠시 일련의 동작들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검황 남궁헌수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남궁헌수의 얼굴은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왜요? 할 말이 있거든 저승 가시는 길에 오붓하게 나누시라니까...”

    “현아와 소미를 납치했다는 그 말...사실인가?”

    “물론 사실이죠. 납치한 당사자가 저기 있는 저놈들이 아니라 저라는 것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떻게 죽고 싶으냐?”

    남궁헌수의 입에서 한 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으스스한 말이 튀어나왔다.

    “후후, 아직 사태파악이 안 되시나 보네요. 납치한 당사자가 저라니까요? 증손녀와 제갈현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으시다면 철저히 저를 보호하셔야 될 거예요. 제가 만일 이곳에서 비명횡사라도 당하는 날엔...곱디고운 두 처자와는 영영 이별하셔야 될 테니.”

    비담의 말에 남궁헌수는 침음성을 삼켰다. 저 악적의 손에 증손녀와 제갈현아가 붙잡혀 있다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죽이는 것은 둘째 치고 곱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지금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럼 대충 상황파악은 한 것 같으니 시작하죠.”

    ‘따악!’

    ‘쐐애액, 슝, 슈웅. 퍼버벅. 퍽퍽. 피융!’

    비담이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화살비가 빗발치듯 쏟아져 연회장을 집어삼켰다. 무공을 익힌 강호의 고수들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무기를 꺼내 화살들을 쳐내느라 정신없었고, 보법을 밟아 피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이미 이번 역모와 관련이 없는 관리들과 하객들은 연회장을 빠져나갔기에 화살을 쏘는 무사들은 손속에 일말의 사정도 두지 않은 채 거침없이 퍼부었다.

    “으악!”

    “커억!”

    여기저기 무공을 모르는 신하들부터 희생양이 되어 쓰러졌고, 무정한 화살은 관통한 것으로도 부족해 땅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련의 무사들과 오정회 측 무사들은 급급히 신형을 뽑아 올렸으나 화살을 쏘던 무사들 뒤로 칼과 창을 든 무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상대하는 바람에 탈출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비담은 화살비를 요리조리 피하기도 하고, 부채로 쳐내기도 하면서 련과 오정회의 무사들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화살을 막기에도 급급했던 무사들은 선강을 머금고 날아오는 부채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주었고, 가끔 눈먼 화살이 비담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검황 남궁헌수에 의해 모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비담을 따라다니는 남궁헌수의 속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으나 증손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남궁헌수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썩은 미소를 날려준 비담은 곧바로 이황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랄 맞은 역모의 주동자이긴 하나 저자가 이곳에서 죽으면 그걸 핑계로 나를 옭아맬 구렁이 영감이다. 그 시커먼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알고? 어떻게든 이황자 저놈을 살려두어야 돼. 나중에 삶아 먹든 죽이든 황제가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방패역할까지 해주려면 무조건 살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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