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54)
  • 100화

    홍무제가 철혈정치를 통해 황권을 강화한지 어언 30년.

    수많은 불협화음 속에서도 제국은 바야흐로 반석 위에 올라섰고, 주변국들은 강대해진 제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평상시보다 더욱 정성을 쏟아 사절단을 꾸리고 진상품까지 준비하였다.

    꾸역꾸역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비담은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스스럼없이 대한 황제의 권력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지금의 충격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능구렁이 같은 황제. 이정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정보를 손안에 주무르는 그가 무림의 동태에 소홀했을 리 없다. 아마도 이번 이황자 건과 태자 측에 붙은 오정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오히려 나를 이용해 그들을 일소에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게 틀림없어. 어리석은 작자들. 이만한 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시하였으니 백 번 당해도 할 말이 없지. 오히려 이번 연회로 인해 무림은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

    후후, 황제가 놓은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덥석 문 너희들의 명백한 패배다.’

    비담은 뒷맛이 씁쓸한지 처연한 눈빛으로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비담이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무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비담에게 보고하였다.

    “선예정랑님,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다름이 아니오라 무희 10명이 감쪽같이 사라져 행방이 묘연합니다. 궁궐 안 가볼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사오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보이질 않사옵니다. 춤을 진상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는지...”

    ‘제갈현아와 남궁소미, 매영은 어젯밤 궁을 빠져나갔고, 나머지 일곱은 여기저기서 보낸 불청객들이로군. 아마도 춤을 추면 빠져나가기 곤란하니 미리 내뺀 모양인데.’

    “그럼 그들을 제외하고 춤을 구성하거라. 정확히 10명이 사라졌으니 종래의 10명이 한 조이던 것을 아홉으로 줄이면 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춤을 만들었으니 큰 무리는 없을 터. 참,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춤이 끝나는 즉시 뒤도 돌아보지 말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거라.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 반드시 모두에게 숙지시켜라.

    알았느냐?”

    “알겠습니다. 선예정랑의 말씀대로 춤을 구성하고, 아이들에게도 숙지시키겠습니다. 그럼.”

    총총 사라지는 무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비담은 남궁헌수가 잠입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세부사항들을 점검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고, 무대 역시 막이 올랐다.

    철통보안 속 예부상서의 주관아래 성대하게 열린 황제의 축하연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드디어 선예당에서 준비한 춤이 무대에 올랐다.

    곱게 차려입은 90명의 무희들은 밝게 웃으며 그동안 연습했던 선무를 날아갈 듯 추며 무대를 누볐다. 연회에 참석한 귀빈들은 여기저기서 탄성을 쏟아내며 춤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황제 역시 기꺼운 표정으로 춤을 감상하였다.

    무려 반 시진 동안 이어진 춤은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며 마무리가 되었다.

    춤이 끝났음을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그동안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수많은 하객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황제 역시 춤을 준비한 무희들을 향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과 함께 묵직한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황제의 하사품을 받기 위해 대표로 황제 앞에 나선 비담은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신 비담, 삼가 황제폐하의 생신을 감축 드리옵나이다. 아울러 분에 넘치는 상품을 내려주셔서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아름다운 춤을 진상하기 위해 그동안의 노고가 눈에 선하구나. 짐이 이토록 즐겁게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모쪼록 충심을 다해 준비한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비담이 정중한 자세로 하사품을 받은 그 순간.

    비담의 귓전으로 황제의 모기의 날갯짓처럼 작은 웅얼거림이 날아들었다.

    “이제 본 공연을 시작하지. 짐은 이쯤에서 빠져줄 터이니 알아서 지휘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역시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후후,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홍무제는 밝게 웃으며 비담의 등을 두드려준 후 금의위의 호위를 받으며 내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사품을 전달하다가 느닷없이 내전으로 사라지는 황제의 모습에 수많은 하객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고, 곳곳에 잠입해 초조함을 달래며 기다리던 무림인들 역시 ‘아차’하는 심정에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전에 황제의 어명을 하달 받은 예부상서 조인문은 약속에 따라 혼란에 빠진 연회장을 서둘러 정리하였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에 하객들이 연루된다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어 뒷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기에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조인문의 지휘 아래 외국에서 방문한 사절단과 하객들은 하나 둘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비담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연회장 곳곳을 살피며 간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였다.

    잠시 후.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연회장엔 이제 대소신료들만 남아 휑한 바람마저 불었다. 이황자 주성은과 승상 후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기에 더더욱 고조되는 초조함과 긴장에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한 이황자 주성은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서 아바마마께서는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내전으로 드신 것이며 사전에 조율이라도 한 듯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하객들을 인솔하는 예부상서의 모습은 또 어찌 이해하란 말인가? 대관절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는 게 순서지 않겠는가?”

    예부상서 조인문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선 이황자를 향해 웃음을 날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조인문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연회장의 큰 문이 쿵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버렸다.

    “가, 감히 저자가...?”

    “휴우,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군요. 나름 재미도 없는 연회를 즐기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본 공연은 지금부터 시작이니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뭐, 뭐라? 본 공연? 감히 인명부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임시관리 주제에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 저 애송이 녀석을 잡아들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나를 잡으라고? 누가 잡혀 나갈지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자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각자 통성명해야 되지 않겠어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서로 인사 나누십시오. 참, 오붓한 분위기 연출을 위해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딱!’

    비담은 손가락 두 개를 튕겨 신호를 보냈고,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철시(鐵矢)를 장착한 연노를 든 동창과 금의위의 무사들이 담과 전각의 지붕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족히 수백을 헤아리는 무사들이 연회장의 사람들을 겨눈 채 무력시위를 하였다.

    대소신료를 비롯해 아직 연회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그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며 눈만 이리저리 굴리느라 바빴다.

    “쯧쯧, 다 큰 어른들이라 부끄러워하시긴. 그리고 이만한 큰일을 작정하고 준비한 어른들이 그리 겁이 많아서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뭐 아무튼 시간 관계상 제가 직접 나서서 소개를 하지요. 우선 불철주야 황제의 위를 넘보기 위해 승상을 등에 업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림의 사특한 세력까지 끌어들인 우리 이황자 주성은.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시죠.”

    “저, 저놈이...”

    활을 겨눈 무사들 때문에 이만 부득부득 가는 이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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