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로부터 얼마 후.
남궁헌수가 비밀리에 묵고 있는 객잔에 나타난 비담은 다급한 신색을 연출하며 두 여인이 납치되었음을 알렸다.
비담의 급보에 도성을 떠나기 위한 철수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남궁헌수는 그만 그대로 굳어버렸고, 급기야 치미는 분노에 노발대발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남궁헌수를 어렵사리 제지한 비담은 차분히 앞뒤 정황을 따져 움직여야만 그녀들을 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그를 진정시켰다.
처음의 흥분과 분노를 차츰 가라앉힌 남궁헌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캐물었고, 비담은 적절히 각색하여 들려주었다.
두 달간 거의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했던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였기에 남궁헌수는 별 의심 없이 비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럼 모두가 사도련이 꾸민 일이로군. 그런데 어찌 저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의문이군.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제 불찰입니다. 아마도 무희들 중 그쪽의 세작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생긴 틈을 적절히 파고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거사 전날 저것들이 음흉한 발톱을 드러내는 바람에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정말 어르신 뵐 면목이 없습니다.”
“자네까지 그럴 필요는 없네. 어차피 저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지. 이렇게 도발한 마당에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제 전면전으로 나설 수밖에.”
“그것보다는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내일 있을 황제의 생신축하연에 맞추어 협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들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것이 저들의 요구조건이니 그것을 반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예 작정하고 어르신께서 태자 측 인물들과 도성에 와있는 오정회의 무사들을 대동한 채 잠입해 계십시오. 그것은 예부상서께 말씀드려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 제가 이황자를 인질로 잡겠습니다.
그럼 어르신께서 나서서 두 아가씨의 신변을 확보함과 동시에 저들의 손과 발을 묶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잠자코 하루를 기다리라는 저들의 요구대로 움직인다면 결국 아가씨들도 구하지 못하고, 황궁의 미래 역시 사도련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
“흐음. 그럼 아예 맞불을 놓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저들은 두 소저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만 믿고 방심할 것입니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만 수적으로 열세인 저희들에게 승산이 있습니다. 생각 같아선 어린아이의 손발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나 우선 당장은 어쩔 수가 없으니...그리고 저들의 이목을 잠깐이라도 분산시킬 수 있으면 성공확률이 더욱 높아질 터인데 적절한 방도가 없으니 못내 아쉽기는 하네요.”
“시선 분산이라...”
“어디서 대포나 축포라도 크게 터지면 정말 좋으련만...그 시간에 맞춰 천우신조처럼 딱 맞춰 그런 우연이 벌어질리 없으니 당장은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도성근방의 세력을 규합하여 머릿수를 채우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시선을 분산시키고 시간을 벌어줄 물건이 필요하다...저놈 손에 들려 보내려던 섬응탄을 사용하는 수밖에. 원래는 저놈에게 누명을 씌워 이황자 측 인물들과 사도련을 싸잡아 족치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나 우선은 내 증손녀와 제갈현아를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저놈 말대로 이황자만 인질로 잡을 수 있다면 오히려 원래 의도했던 대로 일이 풀릴 수도 있음이야. 호시탐탐 노리다 우리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모양인데 나를 우습게 여긴 오늘의 행태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남궁헌수는 비담을 미끼로 하여 저들의 계획을 분쇄함과 동시에 매장해 버리려던 애초의 계획을 버리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워낙 엄중한 사안인지라 자네에겐 미처 알리지 못했던 물건이 있다네. 들켰을 경우 나라의 엄벌을 피할 수 없기에 쉬쉬했던 것이니 너무 섭섭하게는 생각지 말아주게. 다름이 아니라 이번 거사에 혹시 쓰일지도 몰라 오정회에서 보내준 물건이 있는데...막대한 자금을 들여 서역에서 어렵게 구해온 물건이라네.”
‘후후, 서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은 잘도 만들어 내는구나. 간사한 네 놈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음은 꿈에도 모르겠지. 사양치 않고 받을 것이니 어서 그 화탄들을 내게 넘겨라.’
비담은 속으로 오정회의 작태에 대해 연신 비웃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의문의 물건에 대한 호기심만 겉으로 드러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서역에서 들여온 물건이요? 대관절 그게 무엇입니까?”
“쉿!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삼대구족이 멸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물건일세. 오정회와 긴밀히 끈이 닿아있는 상회를 통해 서역에서 어렵게 구한 화탄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탄약은 나라에서 엄금하는 금수물품. 오정회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밀리에 구해놓은 물건의 일부를 내어준 것이라네. 물론 목숨이 경각에 이를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는 엄명도 있었다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거사의 성패여부에 따라 무림의 앞날이 좌지우지 될 수도 있음이니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지. 그래서 난 이번 거사에 이 물건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네.”
“예? 정말이십니까? 그토록 위험천만한 물건을 사용하셨다가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걱정하지 말게. 오히려 이 물건을 이용하여 저 녀석들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게 내 계획일세. 그리고 방금 자네도 말하지 않았는가? 시간을 벌어주고 시선을 분산시켜줄 만한 도움이 절실하다고. 이 화탄을 연회장소 곳곳에 몰래 설치해 놓은 후 내일 터트리면 저놈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음은 물론 나아가 저들에게 누명을 씌울 수도 있음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였는가?”
“그거 묘책이로군요. 화탄이 터지면 연회장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그 순간을 이용해 이황자를 제압하라. 그런 다음 그 화탄의 출처를 저들에게 뒤집어씌우면 한결 일이 수월하게 풀리겠군요.”
“나는 황궁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니 자네가 그 일을 맡아주게. 연회장을 최종 점검한다는 핑계를 대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걸세. 여기 화탄일세. 조심히 다루도록 하고.”
남궁헌수는 비장한 눈빛으로 상자 하나를 건네었다. 워낙 위험한 물건이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비담 역시 침을 꼴깍 삼키는 것으로 자신의 긴장도를 대변하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런 다음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과 인사를 대신한 후 객잔을 빠져 나왔다.
비담은 그 길로 곧장 상자를 들고 대륙전장으로 향하였다. 대륙전장은 국가에서 지정한 공인 전장으로 대륙전역에 분점을 든 명실상부 국가제일의 전장이었다.
암실에 들어선 비담은 자신의 이름과 모습을 철저히 숨긴 채 막대한 돈을 지불한 후 개인금고 하나를 부여받았고, 그곳에 자신이 가지고 온 상자를 보관하였다. 상자의 내용물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추가비용이 들기는 하였으나 신용과 비밀엄수 하나만큼은 대륙 제일이었기에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비담은 문제의 화탄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후 다시 선예당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매영을 호출하였다.
비담이 늦은 밤 자신을 부르자 뭔가를 오해한 매영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어왔으나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꺾는 냉랭한 부탁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저기 침상 옆에 제갈현아와 남궁소미가 묶여 있으니 오늘 밤 저 둘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참, 그리고 사도련의 간자들에게 정보는 흘려두었겠지?”
무참히 꺾인 기대로 인해 조금 의기소침해진 매영이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시키는 대로 모두 전했어요. 그리고 승상 쪽 인물들에게도 접근하여 거짓 명령을 하달하였고요.”
“이황자로 변한 너를 전혀 의심하지 않던가?”
“상공도 꿰뚫어보지 못한 제 변용술입니다. 하물며 무림인도 아닌 그들이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짧은 시간 대면했기 때문에 괜찮을 거예요.”
“그럼 저 둘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내가 말한 장소로 가면 흑천맹에서 나온 구인철 대주가 마차를 대동한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는 그 분을 만나는 즉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저 둘과 함께 도성을 벗어나라. 이곳의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뒤쫓아 가마.”
“알겠어요. 모쪼록 몸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리고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저를 용서해 주시겠다던 그 약조, 꼭 지키셔야 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아무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떠나거라.”
비담의 거듭된 재촉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매영이 마지못해 인사를 한 후 양 어깨에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를 떠안고 선예당 담을 훌쩍 넘어갔다.
비담은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몇 시진 앞으로 다가온 황제의 생신축하연을 떠올리며 마지막 점검에 박차를 가했다.
‘황제에게 한바탕 놀아난 것 같아 씁쓸하기는 하지만 무림인들이 자초한 일이니 깔끔히 매듭을 짓는 수밖에. 훗날 무림의 그 누구도 더러운 이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주마.’
비담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황제의 62번째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가 수많은 축하사절단과 대소신료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