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54)

97화

“어쩌자고 그리 멍청한 짓을 서슴없이 벌일 수 있는지. 도대체 생각이 있는 작자들인지 의심스럽네요.”

“원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자네 같은 사람이 무림의 수장이라면 별 문제 없이 돌아갈 터인데. 어때? 탐나면 그리 만들어줄까? 나에겐 그만한 힘과 능력이 있다네.”

“됐습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자리에 앉아 뭐 하겠습니까? 벌써 인생 종치기엔 제 앞날이 창창한지라 사양하겠습니다.”

“정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고. 그럼 짐의 딸은 어떠한가?”

“첫날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가만 안 놔두겠다던 그 왈가닥 아가씨요? 사양하겠습니다. 괜히 이번 일에 슬쩍 끼워서 저에게 떠넘길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무림인들의 과욕이 저지른 불상사니 이것만 깨끗이 해결하면 셈이 끝나니까요.”

‘사도련주 이 망할 놈의 새끼. 나중에 면상 한번 제대로 보는 날엔 가만 안 둔다. 왜 너저분한 그 녀석의 뒤치다꺼리까지 내가 해야 하냐고. 그리고 오정회 이놈들도 정신 나간 작자들이지. 놀아날 장단이 없어 그놈들 손에 놀아나나. 멍청한 놈들. 소화시키지도 못할 달콤한 열매 따 먹자고 스스로 소중한 울타리를 부수다니. 하여튼 정이 안가요.’

“그럼 폐하의 제안대로 따를 것이니 무림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마음 같아선 무림이 뒤집어지던 어쩌던 상관하고 싶지 않으나 제가 몸담고, 숨 쉬며 살아가는 소중한 곳이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네요. 그나저나 폐하는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자식과 관리들을 싸잡아 족치려 하시다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은 허언이 아니지. 짐 역시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면 은퇴하여 조용히 남은여생을 즐길 생각이라네. 그러기 위해선 눈에 거슬리는 화근을 미리 잘라버리는 게 최우선이지. 그러니 알아서 잘 처리해주게.”

“알겠습니다. 여우들 좀 족치려다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네요. 이번 기회에 폐하의 뜻대로 깨끗이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제대로 흐려놔야만 물 안의 뭇 생명들이 보호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게.”

“깔끔한 비유 감사드립니다. 소신 역시 무림인이기에 탐탁지 않으시다는 거 알고 있으나 제대로 성심을 다해 휘저을 것이니 맡겨 주십시오.”

‘휴우, 오정회 놈들이랑 이황자를 미는 사도련 놈들이랑 신나게 싸움 붙여놓고 조용히 내빼려 했더니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 아주 다 죽었어, 이것들. 그나저나 앞으로 태자마마 모실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구나. 무림이 대체 뭐라고 동경을 하셔서 팔자에도 없는 길잡이를 하게 만드는지. 그나마 철부지 공주는 합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비담의 시름이 깊어질수록 황제의 미소는 짙어져갔다.

‘어설픈 미꾸라지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되는군. 승상이 쥔 병권도 만만치 않고, 더불어 무림과의 마찰까지 고려하느라 어찌 손을 써야하나 고심하던 차에 알아서 굴러들어온 복덩이야. 저놈이 나서서 시선을 분산시켜준다면 손쉽게 그 녀석들을 제거할 수 있겠어.’

황제와의 떨떠름한 협상을 잘 마무리한 비담은 다음날부터 무희들에게 제대로 된 선무(扇舞)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화류선법의 움직임 중에서 적절한 동작들을 추려 매끄럽게 이은 것이다.

한 달간의 지옥훈련을 성공적으로 견뎌낸 무희들은 비담이 요구하는 동작들을 무리 없이 소화하였다.

비담은 100명의 무희가 하나의 커다란 주제에 맞추어 융화되도록 유도하였고, 호되게 당한 무희들은 하나의 가르침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배웠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은 쏘아 놓은 화살처럼 지나갔고, 드디어 홍력제의 생신축하연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동안 본 교관을 믿고 열심히 따라와 준 여러분들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제 춤은 모두 완성이 되었고, 드디어 내일이면 그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한 선무를 황제폐하께 진상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마지막 연습을 하며 맞추었던 대로 내일도 실수 없이 잘 해주리라 믿고 오늘은 그만 해산하도록. 참, 부채와 의상을 점검하는 것 잊지 않길 바란다.”

하나같이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상기된 무희들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비담은 그 중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에게 자신을 찾아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날 매영의 결정적 제보가 있었기에 오늘 미리 손을 쓰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이권과 세가의 미래를 위해 서슴없이 화탄을 제조한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사용할 생각까지 하다니. 그것도 허허벌판이 아닌 황궁의 한복판에서 위험천만한 화탄을 사용한다는 것이 제정신 박힌 사람이 벌일 수 있는 일이냔 말이다. 아주 무림을 시궁창에 처박을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예부터 손에 왕창 움켜쥔 놈들이 더 가지기 위해 사족을 못 쓴다더니 딱 사도련과 오정회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군. 내일이면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혀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될 터. 오늘밤 골빈 저년들 손보는 것을 시작으로 화려한 막을 올려야겠어.’

그날 밤.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선예당 비담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내일 벌어질 거사에 대해 최종점검을 하고 마지막 조율을 하기위해서 자신들을 부르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별다른 경계심 없이 찾아왔다.

비담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한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에게 우선 용정차부터 권하였다. 그런 다음 밝게 웃으며 그녀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두 달 동안 본의 아니게 함부로 군 점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다행히 두 분 소저께서 노력해주시고 참아주신 덕분에 별다른 의심 없이 무사히 내일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무림을 좀 먹는 세력들이 일거에 소탕되고, 다시 평화가 깃든다면 모두 두 분 소저의 공입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저희들이 한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나저나 저희들이 할 준비는 모두 끝마쳤으니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런데 다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최고급 용정차인 듯한데...저희들에게 이리 선뜻 내어주셔도 괜찮습니까?”

“하하, 괜찮습니다. 그동안 고생해준 아가씨들을 위해 마련한 저의 조그마한 성의니 괘념치 마시고 드십시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들을 보자 하셨는지요? 내일의 거사 전까지는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사온데...”

“별 뜻은 없습니다. 다만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 오늘밤이 지나면 다시 뵙기 힘들 것 같아 제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듣고 보니 공자님의 말씀이 맞네요. 모쪼록 헤어짐이 아쉽기는 하나 앞으로 하시는 일들이 잘 풀려나가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목적을 숨긴 채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음미하는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몸의 이상을 먼저 알아챈 것은 제갈현아였다.

급속히 호흡이 가빠지며 점점 상승하는 체온으로 인해 정신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몽롱하게 풀려가는 동공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급기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비 공자님? 제, 제 몸이 이상한 데요?”

“어, 언니도? 나도 방금 전부터 계속 빙글빙글 돌고, 온몸이 간지러운 게 참을 수가 없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후후, 약효가 벌써 전신에 퍼졌군요. 그럼 우리만의 전야제를 먼저 시작해 볼까요?”

비담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옷을 한 장 한 장 벗기 시작했다. 최음제의 효과가 전신에 급속히 퍼지기는 하였으나 아직 한 가닥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음침하게 웃으며 옷을 벗는 비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채 오싹 한기가 스미는 것을 느꼈다.

“도, 도대체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가, 감히 우리를 어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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