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후후, 자네가 이해하게. 융통성이 없어 사람을 쉬이 사귀지 못해 저럴 뿐 가진 바 능력이나 충심은 제국을 채우고도 남을 인사니까. 차차 나중에 안면을 트고 말을 섞다보면 저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네. 참,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가? 자네도 이미 짐작했다시피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고 보면 되네. 평화로운 황실의 분위기에 취해 길들여지다 보면 이황자 성은처럼 그런 멍청한 짓이나 벌이게 되지.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이곳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지.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고, 조금이라도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별의별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 곳. 자네는 그런 이곳에 전혀 물들지 않은 신선한 물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고여 있는 물은 썩는 법이니 이번 아바마마의 생신축하연에 맞추어 신선한 물을 대고 싶은 일념뿐이라네. 물론 그 과정에서 신선한 물을 따라 나 역시 흘러나가고 싶다는 소박한 속내를 숨기지는 않겠네. 이제 됐는가?”
“후후, 소박해 보이지는 않으나 태자마마의 속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무림정파랍시고 깝죽대는 저것들과도 손을 끊으실 작정이시군요?”
“자신들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권력의 떡고물이나 주워 먹겠다 달려드는 미련한 놈들이지. 저것들에게 휘둘려서야 동생들 볼 면이 서겠는가? 철부지 성은이야 이미 발을 담갔으니 조용히 타이르는 수밖에.”
“그래도 저를 너무 신뢰하시는 것 같군요?”
“기둥위에 숨어있는 동창을 우습게보아선 곤란하지. 내 마음만 먹으면 자네 속옷이 몇 장 있는지, 어떤 여인과 몇 번 동침을 했는지도 쉬이 알아낼 수 있음이야. 처음부터 권력에 눈이 멀었다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내 동생의 존재를 알고도 그리 굴리진 않았겠지. 아직 철이 없기는 하지만 아바마마께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아이이니 적당히 굴리게. 그러다 토라지면 나 역시 감당하기 힘들다네.”
“알겠습니다. 무슨 연유로 공주마마께서 끝까지 버티시는지 알 순 없으나 앞으론 적당히 하죠. 그리고 태자마마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사라지려 했는데 전면에 나서서 설레발치는 수밖에요. 썩어 고여 들어가는 더러운 물이 얼마나 정화될는지 장담할 순 없으나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우이. 어려운 부탁인데도 이리 선뜻 응해주니 찾아온 보람이 있구먼. 그나저나 이젠 내가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차례로군. 뭐든지 말만 하게. 내 힘이 닿는 일이라면 성심을 다해 노력할 터이니.”
“됐습니다. 차라리 어린아이 볼에 붙은 밥풀을 띠어 먹는 게 낫지요...”
“자네 뭐라 중얼중얼 거리나? 잘 안 들리니 어려워말고 크게 말해봐.”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혼잣말을 했으니까요.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괘념치 마시고 차나 한 잔 들고 가십시오.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런가? 난 큰맘 먹고 찾아왔는데 보기보단 소탈한 성정을 지녔군. 혹시 나중에라도 내게 부탁할 일이 생각나거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뭐든 자네의 소원이라면 한 가지 들어주겠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지금 당장은 없으니 그럼 나중에 생각이 나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마침 차를 구하러 나갔던 관리가 돌아오는군요. 태자마마의 입맛에 맞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접하겠습니다.”
관리가 부리나케 구입해온 용정차를 마시며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자 주은명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담백한 성정의 비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으려 하였고, 결국 비담이 무희들의 훈련을 핑계 삼아 조심스럽게 축객령을 내리고서야 아쉬운 듯 자신의 처소인 동인궁으로 돌아갔다.
태자 주은명의 등장으로 인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희들은 비담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동자세를 취하며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비담은 그동안 무희들을 굴리며 나름 소소한 삶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라진다 생각하자 밀려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노인네. 구렁이 수십 마리를 삶아 먹은 길천 형님보다 더하다니까. 어찌 태자가 오늘 나타날 것이라 알아맞힐 수 있는 거지? 정말 귀신같다니까. 괜히 어설프게 내기를 해가지고 내 금쪽같은 재미를 날려버리게 생겼으니. 휴우, 그래도 내기는 내기니 따르는 수밖에.’
“그동안 수고해준 여러분들의 노고에 본 교관은 큰 감명을 받았다. 기초체력단련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고 내일부터 진짜 제대로 된 춤을 전수해 주겠다.
그동안 본 교관의 깊은 뜻도 모르고 힘들다며 징징대던 여러분들은 춤을 배우는 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과 나비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경악할 것이다. 앞으로 내가 전수하는 춤을 바탕으로 진정한 무예(舞藝)가 무엇인지를 깨닫길 바라며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끝마친다.
해산!”
아직 한참의 훈련시간이 남았음에도 서둘러 해산명령을 내리는 비담으로 인해 무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술렁술렁 거렸다.
야차 같던 비담의 얼굴이 선동(仙童)으로 보인다며 자신의 볼을 꼬집는 무희도 여럿 보였다. 비담은 무희들이 소란을 떨던 볼을 꼬집던 상관하지 않고 선예당 안으로 사라졌다.
비담이 사라지고 나서야 실감이 났던지 그제야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한 달간의 고생을 깡그리 날려버릴 정도의 달콤한 휴식에 무희들은 치솟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날 밤.
선예당 자신의 숙소에 머물고 있던 비담은 익히 예상했던 귀빈의 방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신 비담, 삼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하하, 첫날 노망난 늙은이 어쩌고 하며 바락바락 대들던 패기는 어디가고 이리 고분고분 예를 갖추는가?”
“그때는 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죽을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같은 황궁 안에서 그리 평상복을 입고 잠행을 하시면 어느 누가 황제폐하인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신의 무례를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오라 엄연히 폐하께도 책임이 있는 것이옵니다.”
“허허, 팔불출 아비가 딸 얼굴이 보고 싶어 잠행을 나섰다 그리 알아듣게 설명하지 않았는가?”
“지엄하신 군주가 야밤에 그리 나돌아 다니시면 곤란하지요. 제발 저처럼 힘없는 하급관리의 처지도 생각해 주십시오. 이거 오금이 저려서 함부로 나랏밥 먹겠습니까?”
“하하하, 자네의 입담은 여전하구만. 내기에서 진 속상함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은 짐이 한 발 양보하지.”
사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소탈하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노인은 철혈의 대제로 불리며 한때 대륙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황실의 진정한 주인, 홍력제(洪力帝) 주형호(周炯浩)였다.
공식적인 업무는 아니었던지 금의위의 영반만 대동한 채 늦은 밤, 선예당에 나타난 것이다. 비담은 낮에 태자 주은명에게 대접했던 용정차를 손수 끓여 홍력제에게 대접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예의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한 채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호오, 이런 궁벽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품 있고 훌륭한 차로군. 입만 걸걸한 줄 알았더니 제법 차를 보는 안목도 지니고 있었군. 그나저나 짐에게 손수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차 같지는 않고...낮에 태자가 다녀갔던 게로군.”
“폐하의 예상대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한 시간에 태자가 오셨지요. 그나저나 폐하께서 바라시던 대로 눈에 넣으셔도 아프지 않을 공주마마가 고생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만족하시는지요? 제가 그토록 강하게 길러야한다 간하였사온데...”
“허허, 자네도 나중에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얻어 보게.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 눈앞에서 떠는 재롱에 무너지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되는지. 그건 그렇고 태자를 직접 만났으니 이제 짐의 제안에 답을 주겠는가?”
“휴우, 답을 드려야지요. 그런데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무언가?”
“왜 뜻을 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군. 짐 역시 일국을 다스리는 황제이기 전에 자식을 둔 부모일세.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짐의 치적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황궁을 뛰쳐나가려 한다는 사실을 짐이라고 왜 몰랐겠는가. 허나 여린 성정을 어떻게든 다듬어 황제의 재목으로 키워보려 노력했으나 짐이 잘못 판단하였던 거지. 무조건 억누르려 하다 보니 엇나가고 말았던 게야.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 같지가 않구먼. 저 아이가 입었을 상처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보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새장에 갇혀 세상을 경영했다 착각하며 산 세월을 저 아이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더군.”
“그럼 이황자가 무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사전에 알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후후, 그 녀석으로 인해 태자가 자극을 받으면 여린 심성이 고쳐질까 싶어 그냥 내버려두었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것을 이용해 뛰쳐나가려 할 줄은 짐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로 인해 짐의 마음이 돌아섰으니 태자의 작전이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군.”
“소신이 만약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번에도 말했듯 무림을 지워버려야지. 감히 황권에 도전한 그놈들을 곱게 내버려둘 짐이 아니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