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54)

95화

그렇게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황궁에 들어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이제 무희들의 눈빛은 흡사 잘 벼린 칼을 든 무사들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비담은 무희들을 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춤은 언제 배우냐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으나 비담은 그저 천하태평 무희들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리고 이정도 고통이나 단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던 무희들이 더욱 높아진 강도에 혀를 내두르며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그녀들을 구원해준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자신의 처소인 동인궁(東仁宮)을 잘 벗어나지 않기로 유명한 태자 주은명이 선예당을 방문한 것이다.

비담은 입안의 혀처럼 굴며 철저히 권력에 아부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며 무희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고, 그러한 원성은 비담의 눈 흘김 한방으로 순식간에 무마되었다.

“누추한 이곳까지 태자마마께서 직접 왕림해 주시니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직 황제폐하께 진상할 춤이 외부에 공개되어선 곤란한 입장이라 괜찮으시다면 소신을 따라 자리를 옮기심이 어떠신지요?”

“그런가? 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군. 그럼 자네 말대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나 역시 아바마마의 생신축하연에 선보일 춤을 미리 엿본 치졸한 사람이 되기는 싫으이.”

“치졸하시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다만 제 뜻은 그날의 감흥을 위해 잠시 아껴두셨으면 좋겠다 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고...”

“하하하, 내 듣기론 정말 괴짜 같은 사내가 하나 들어와 요 근래 궁 안이 소란스럽다 하여 심심하던 차에 구경이나 할까 들렀는데 이제 보니 괴짜가 아니라 군자 중의 군자였구먼. 이리 아바마마와 나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을 보니 충신이로세. 자네가 난색을 표하니 그만 놀리고 그럼 자리를 옮기세. 대신 근사한 차를 내와야만 용서해줄 수 있음이야.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비담의 축객령을 받아들인 태자 주은명이 비담의 쩔쩔매는 모습을 뒤로하고 선예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담은 선예당의 관리들을 닦달하여 최고급 차를 준비하라 일렀고, 그런 차는 없다며 울상을 짓는 관리들에게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주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당장 전문대가로 뛰어나가 최고급의 용정차를 구해오너라. 태자마마께 진상할 것이란 귀띔을 하고 돈 역시 달라는 대로 치르거라. 어서 빨리 움직여!”

관리는 엉덩이에 불붙은 송아지마냥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만에 하나 무희들에게 튀는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관리를 윽박질러 차의 준비까지 마무리한 비담이 서둘러 태자가 앉아있는 선예당으로 뛰어갔다.

“송구스럽습니다, 태자마마. 제가 거하는 곳이 궁 안에서 제법 옹벽하고 외지다보니 태자마마의 입맛에 맞는 차가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런데 따로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지은 죄는 없사오나 간이 오그라들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다하였으니 혹시 꾸짖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라면 빨리 혼내주셨으면...”

“하하하, 소문대로 괴짜로군. 어찌 알았는가? 미리 누구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꾸짖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느냔 말일세.”

“저, 정말이시옵니까? 저도 모르게 그냥 나온 말인데 정녕 사실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소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든 벌을 달게 받을 것이니 하문해주십시오.”

“그럼 여기까지 찾아온 김에 사실대로 말하겠네. 혹시 무희들 중에 내 동생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네? 자, 잠시만. 그럼 태자마마의 말씀대로라면 공주마마께서 저기 마당에 계시다는...?”

“그렇다네. 내 그리 말렸으나 아바마마께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드리고 싶다며 사정을 하더군. 잠시 행궁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선예당에 덜컥 지원을 하였지. 철저히 비밀을 지켜달라는 희령이의 부탁에 그리 약조를 하였네만 너무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선예당에 머물고 있는 무희들의 근황에 대해 알아오라 시켰더니 아주 가관이더군. 첫날부터 빠짐없이 모두 보고를 받았다네. 자네야 전혀 몰랐다며 발뺌을 하겠으나 일은 이미 크게 벌어지고 말았네. 아바마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희령이를 그리도 모질게 굴렸으니 살아남기는 무척 힘들 거야. 혹시 남길 유언이 있으면 지금 내게 하게나. 나중에 성심성의껏 자네의 묘비에 새겨주겠네.”

“저, 정녕 제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는 것이옵니까?”

“장담하건대 일할이 채 되지 않을 걸세. 내 조사에 따르면 제법 출중한 무예를 익혔더군. 흔히 강호인들이 말하는 화경의 경지라던가? 하지만 이 제국의 명실상부한 주인은 엄연히 천자인 아바마마시지. 길가의 아무렇게나 핀 잡초까지도 모두 천자인 아바마마의 것이야. 한마디로 자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하여도 제국의 수백만 정예 병사들을 상대로는 힘에 부쳐 얼마 버티질 못할 걸세. 내가 말한 일할의 확률이란 무사히 대륙을 빠져나가 다른 나라에 숨어 사는 것이지. 그 역시 제국의 입김이 닿지 않는 궁색하고 옹벽한 나라여야만 가능하다는 뜻일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였는가?”

“그,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셨는지 소신은 이해를 못하겠사옵니다. 미리 알았다면 공주마마께 그런 결례를 저지르는 만행 따위는 벌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심을 다해 모셨을 것인데...”

“그것을 염려한 희령이가 사전에 말린 것이지. 아바마마께 진정한 선물을 드리려면 똑같이 구슬땀을 흘리고 싶다 하더군. 특별대우를 받으며 춤을 배우기는 싫었던 게야. 그래야만 가치가 있는 법이라며 밝게 웃는 동생의 모습이라니...어떤가 속이 꽉 차지 않았는가?”

‘속이 꽉 차긴 하였어도 그것 때문에 제가 고달프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변신괴물로도 부족해 잠입공주라니...에효, 이놈의 팔자. 어째 편하게 하루하루가 잘 흘러간다 싶더니만.’

“곧 오늘이라도 당장 죽을 사람처럼 그리 울상을 짓지는 말게.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얼굴이 생명이지 않는가? 그러다 주름 생기네.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으니 용기를 가지게. 그리고 혹시 아는가? 눈앞에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줄 줄이 떡하니 나타날지.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생명력과 힘을 얻는 법이라네.”

“알겠습니다, 태자마마. 소신이 옹졸하여 한 치 앞만 내다보았군요. 소신 태자마마의 위로와 당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암, 그렇게 나와야 훌륭한 신하라 할 수 있지. 곧 죽어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설령 윗분들께 대드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자시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용기, 그런 기백이 있어야만 사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나 역시 한 번 제대로 물 먹여줄 용의가 있는가? 자네가 약조만 지킨다면 자네를 구원해줄 한줄기 빛이 되어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신 알아듣지를 못하겠습니다. 지금 공주마마를 저 지경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태자마마에게 물을 먹이다니요? 소신의 목은 열 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일 뿐입니다. 소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몰라도 들어드릴 수 없사옵니다.”

“그래?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는가? 아무래도 동창의 제독을 제대로 굴리고 촌구석에 쳐 박든지 해야 되겠구먼. 어디서 그따위 정보들이나 물어오고 말이야. 이번 기회에 아바마마께서 내게 품으신 어설픈 기대를 무참히 꺾어 근엄하신 용안이 잔뜩 일그러지게 만들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였는데. 할 수 없지. 피 튀기는 궁의 한복판에서 집안싸움이나 일삼으며 형제들 골로 보내고 피로 얼룩진 용상에 떡하니 앉아 평생을 자네 하나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수밖에.”

“무슨 말씀을 그리 살벌하게 하시는지요? 누가 들으면 제가 공주님을 괴롭힌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로 용상에 앉겠다는 말씀으로 들리옵니다.”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 제독에게 들어 모두 알고 있다네. 그 사람이 융통성이 없기는 하여도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거든. 형제들 아귀다툼 하는 꼬락서니도 보기 싫고, 손에다 철부지 동생들의 뜨거운 피 묻히기도 싫어서 그동안은 쉬쉬하며 참았네만 쉬이 고집을 꺾을 양반이 아니시거든. 뭐 이만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선 가면을 몇 개씩이나 구비하며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너무 고집불통이시지 뭔가. 내 그리 황제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 읍소를 하였건만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나는 그분처럼 살 자신도 없고, 그리 살기도 싫은 사람이네. 그놈의 정이 뭔지 동생들 때문에 뛰쳐나가지 못했을 뿐 지금이라도 당장 이 답답한 궁을 벗어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일세.”

순간 비담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쩔쩔매며 태자 주은명의 비위나 맞추던 하급관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비담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자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정녕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하십니까? 누구나 꿈에서라도 바라마지 않는 자리이나 하늘의 아들이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 자리. 그 숭고한 자리를 이리 걷어차고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냐 묻는 것입니다.”

“후후, 이제야 자네의 본 모습을 보이는구먼. 조금은 나를 인정했다는 뜻이니 흡족하군. 숙부들이 하나둘 피를 흘리며 사그라지는 모습, 황권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외숙들 역시 차디찬 바닥에 쓰러지는 처참한 광경을 보며 자란 나일세. 그 자리가 모두가 떠받들고 우러러보는 지고한 자리이지만 그만큼 외롭고 피로 얼룩진 자리이지. 나는 그것을 대물림하기 싫다네. 삼황자라면 성정이 온화하고 지혜로우니 불협화음 없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야. 나보다 냉정한 구석도 많으니 쉽사리 휘둘리지도 않을 테고. 이제 내 본심을 헤아렸는가? 아니면 아직도 부족한가?”

“모두 동창이 물어온 것입니까? 그리고 하필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비담의 말에 선예당 한쪽 기둥사이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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