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가 축 쳐진 무희들은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제 죽으나 사나 두 달을 이곳에서 견뎌야만 해방될 수 있었기에.
비담이 선예당에 마련된 자신의 숙소에 머물며 이것저것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하루사이에 얼굴이 누렇게 죽어버린 제갈현아와 남궁선미가 면담을 요청했다. 비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둘에게 차를 권하며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자중하셔야 될 분들이.”
비담의 말에 제갈현아는 바로 볼멘소리로 화답했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알다시피 황궁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암약하는 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일이 터지면 춤이고 나발이고 모두 소용없는 것인데 이토록 죽자 살자 매달리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좀 적당히 하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저희를 한사코 남은 스물에 끼워 괴롭히는 저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허허, 그리도 무사안일 해서야 어찌 큰일을 도모하려는 것입니까? 적을 속이기 위해선 자기 자신부터 속이라는 병법서의 지침대로 저는 아군부터 속인 것이지요. 조금 괴로우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오늘 제가 벌인 일련의 효과로 인해 이 안에 숨어들어온 저들의 눈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아직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분명 냄새를 맡은 간자들이 무리에 섞여 있습니다. 저 역시 소저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을뿐더러 무척 가슴이 아프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고 오정회의 번영을 위해 하는 일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하루 속히 그 간자들을 색출하여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저, 정말입니까? 그리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시켰건만 저들의 간자가 숨어들어왔다니...”
“아직은 제 짐작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저들 역시 손쉽게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무임승차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 하루 제가 그리도 매섭게 대하고 굴렸건만 역시나 독종들답게 묵묵히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견디더군요. 물론 그 과정에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소저들께 모질게 대한 점 용서해주십시오. 저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임시방편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외출 역시 삼가 하였으나 얼마의 효과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죄라도 지은 듯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비담의 진심어린 행동으로 인해 화를 내러 왔던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더 이상 추궁하기가 멋쩍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나라의 안위와 오정회의 앞날을 위해서라는데 뭐라 더 따진단 말인가.
“휴우, 공자님의 깊은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속 좁게 군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앞으로 간자들이 색출될 때까지 계속 이 짓을 해야 하나요?”
“면목 없고 죄송하지만 그래야 될 듯싶습니다. 저 역시 춤을 핑계 삼아 더욱 모질게 단련하며 압박을 가할 것이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본의 아니게 소저들을 대하더라도 제 진심이 아님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어쩔 수 없죠. 간자들이 섞여 있다니 더욱 행동을 조심하며 견디는 수밖에. 오늘의 경거망동은 잊어주십시오. 이리 공자님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역시 저들에겐 좋은 먹잇감일 테니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후후후, 네까짓 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 마음껏 괴롭히다 종래에는 자근자근 내 아래에 짓밟혀 울며불며 애원하고 사정하게 만들어주마.’
비담은 남아있는 차를 후루룩 마시며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음침하게 웃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모두 비울 무렵.
비담의 예상대로 또 한 명의 무희가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번엔 매영인가? 도대체 어떤 무희로 변신하여 섞여 있었는지 궁금하군.’
“들라하라.”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무희 하나가 비담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 바로 울음부터 쏟아냈다.
물론 마지막 정예 스물에 끼어있던 얼굴이었다. 비담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희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채 지켜보았다.
“흑흑, 저에게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토록 뜨거운 밤을 함께 지새우며 서로의 몸을 탐했으면서도 변한 저를 못 알아보시고 그리 막 대하시다니...”
“누가 너보고 여기 들어오래? 바득바득 우겨서 여기 들어온 건 너야. 왜 이제 와서 징징 짜며 귀찮게 구는데? 너 자꾸 그리나오면 확 그냥 안 보는 수가 있어. 나는 그리 질질 짜는 거 무지 싫어한다고 얘기했잖아.”
“훌쩍! 알았어요. 안 울면 되잖아요.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토설했는데 아직도 그리 미우세요? 이제는 좀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시면 안돼요?”
“내가 누차 말했지. 난 너한테 관심 없다고. 그냥 목숨 부지하게 해줬으면 알아서 떠날 것이지 왜 끈덕지게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네.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최소 사망이야.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목숨을 살려주었으면 ‘고맙습니다.’하며 물러가도 시원찮을 판에 왜 자꾸 안아 달라 떼를 쓰는 거냐?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확 궁에서 쫓아내기 전에 숙소로 안 돌아가? 그리고 궁에 끌고 들어왔으니 네가 한 약속이나 잘 지켜. 내가 부르기 전에 한번만 더 먼저 찾아왔다가는 동침이고 나발이고 물 건너 간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요. 다시는 먼저 찾아오지 않을 테니 노여움 푸세요. 대신 약속대로 그년들과 무희들 감시하는데 최선을 다할게요. 그럼 공자님도 저를 안아 주겠다 하신 그 약속 꼭 지키셔야 돼요?”
“알았으니 그만 나가봐. 그리고 걸리는 날엔 알아서 조용히 뒤집어쓰기로 한 것도 잊지 말고.”
무심하게 손을 내저으며 쫓아내는 비담의 행태에 매영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며 선예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시커멓게 타들어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며 그리 빌었건만 용서해주시질 않는구나. 하기야 내가 되었더라도 쉬이 용서할 순 없었겠지. 이제와 지난날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쪼록 공자님께서 내 마음을 받아주시는 날까지 성심을 다해 보필하고 매달리는 수밖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매영의 뻥 뚫린 마음을 위로해주듯 빛을 흩뿌렸다.
비담은 매영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 씁쓸한 마음을 꺼내었다.
‘나 역시 당신을 이리 모질게 대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이 말한 대로 꿈으로 가득했던 꽃다운 나이에 짐승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하고 세상 모든 사내를 적으로 돌렸다는 말과 아픔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라오. 허나 그러한 변명이 여태껏 저질러온 당신의 과오를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며 속죄하겠다는 당신의 가슴 절절한 외침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그것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기회를 드렸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낙인찍히듯 평생을 안고 가야할 상처로 인해 괴로워할 매영을 생각하며 비담은 심심한 위로의 말을 마음속으로 건네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일찍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기에 진원지기의 흡수를 멈출 수 있었고, 그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는 비담이었다.
비담은 매영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잘못은 그것으로 깨끗이 셈을 끝내기로 하였고, 앞으로 무림을 위해 일조함으로써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와 잘못, 후회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매영과의 일을 겪으며 색공의 위력을 여실히 깨닫게 된 비담이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매영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루만지며, 보듬어 줄 수 있었던 데에는 색공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담은 다시 한 번 망치로 얻어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요란했던 황궁에서의 첫날밤이 무사히 지나가고, 다음날부터 비담의 만행은 가일층 강도를 더해갔다.
첫날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무희들은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구르고 또 굴러야만 했다. 오로지 춤을 배우기 위한 기초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선착순, 뜀뛰기, 기마자세, 한 발 들고 오래 버티다 낙오자는 또 보충수업을 받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우아한 몸짓과 기품 있는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오로지 치열한 생존만이 그녀들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비담에게 찍힌 스무 명의 고달픔이란 설명조차 불허했다. 그냥 죽지 못해 버틴다는 말이 그나마 비슷할 정도로 그녀들의 생존기는 눈물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