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인간이 연출할 수 없는 최악의 표정을 지으며 약을 입안에 물고 있는 무희들을 보니 더 이상 버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비담은 아쉽다는 듯 손에 든 통을 돌아보았다.
“기껏 정성을 들여 만들어놨더니 싱겁게 포기해 버리네. 이 재료들 구하느라 내 주머니가 거덜 날 정도로 탕진하고 고생했는데. 많이 아쉽네, 쩝.”
입맛을 다시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비담을 향해 서른 명의 여인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무슨 일이든 앞으로 절대 토 달지 않고 성심을 다해 나리를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니 제발 저희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그래? 그럼 약속하는 거다. 앞으로 한번만 더 오늘 같은 만행을 저지른다면 남은 이 약을 다시 꺼낼 것이니 명심하길 바란다. 그럼 굳게 입을 쳐 닫고 있는 저 스무 명만 처리하면 되겠군.”
비담은 안도의 눈으로 새로운 삶이라도 얻은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른 명의 항아리를 시원하게 부셔버린 후 남은 스물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후우. 내 특제약에도 굴복하지 않다니. 정말 너희들의 굳은 심지와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비장의 한 수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깨끗이 포기하고 너희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 그래도 혹시나 마음이 바뀌었다면 내가 셋을 세기 전에 말을 하거라.
하나! 둘!...셋! 저런...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군. 어쩔 수 없지. 마지막 비장의 수를 꺼내는 수밖에.”
남은 스무 명의 여인들은 필사적으로 입을 벌려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혈이 제압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해 죽겠다는 눈빛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발광하였으나 비담은 그저 느물느물 웃으며 준비한 물품을 향해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중 제갈현아와 남궁선미, 더불어 매영은 정말 미쳐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대관절 저 미친 작자가 왜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한 배를 탄 동료에게까지 저런 무리수를 쓰는 연유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비담은 방글방글 쪼개며 옻나무 다발을 들고 돌아섰다.
“좋아, 좋아. 그 정도 객기와 참을성을 갖춰야만 훌륭한 춤을 소화할 수 있는 법. 지금 남은 스물은 앞으로 특별관리 대상으로 묶어 섭섭지 않게 지극한 관심을 쏟을 것이니 기대하라고. 그럼 마지막으로 온몸이 가려워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긁지 못하는 고통을 경험해 보도록. 물론 이것 역시 남만에서 구해온 특제 옻나무라 웬만한 사람은 옻을 타게 되어 있지. 내가 구해온 해소제가 아니고서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벗어날 방법은 요원하니 알아서 견뎌내. 후후, 지금에 와서 그런 불쌍하고 억울하다는 눈빛 보내봐야 소용없어. 내 그리 입을 열 기회를 줬음에도 꾹 다물고 끝까지 버틴 것은 너희들이니까. 지금도 이리 기회를 주건만 모두 입을 굳건히 다문 채 버티고 있잖아? 내참 가소로워서.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자고.”
‘야! 이 미친 작자야. 네가 아혈을 풀어줘야 입을 열어 말을 할 것 아니야? 도대체 우리랑 무슨 철천지원수를 지었기에 이리도 핍박하는 것이냐? 제발 부탁이니 아혈 좀 풀어주라고.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나리~!!!!!’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고, 애원하며 절규했으나 무정한 비담은 실실 웃으며 덕지덕지 옻나무 액을 무희들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혈이 제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나오며 남은 스무 명 여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온몸을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로 가려움이 밀려들었으나 항아리에 묻혀 손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슬슬 신호가 오는구나. 앞으로 일각.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미쳐 돌아버릴지도 모르니 적당히 끝내야겠어. 이정도 당했으니 이제 내 말이라면 흡사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이다. 후후, 이게 끝이라 생각지 말거라. 나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기엔 아직 멀었으니.’
남은 스무 명의 무희들은 일각동안 정말 생지옥을 경험하였다. 도저히 그녀들의 상식으론 현세에 도래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비담은 적당히 시간을 재다가 무희들을 놀리며 약을 올렸다. 물론 시시각각 더해지며 엄습하는 고통으로 인해 그녀들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정말 깡다구 하나는 끝내주는 여인들이구만. 비명소리 하나 지르는 자가 없다니. 어라? 이상하네. 아차차, 이거 그러고 보니 내가 아혈을 풀어주는 걸 깜박했구나. 그놈의 방귀냄새 때문에 내 정신마저 혼미해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쩐지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기에 이상하다 여겼는데 미안.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이 멍청한 것들아.”
바닥에 쓰러진 80명의 무희들은 어이를 상실한 채 비담을 두려운 듯 쳐다보았다. 미쳐도 저리 미치면 방법이 없겠다 싶어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면서도 행여 들킬세라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대관절 입을 단단히 막아 놓고 미리 말하지 않았다 탓하는 것은 어느 나라 개소리인지.
비담은 차근차근 스무 명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이 답답이들아. 뭐 아무튼 이제 포기할 자들은 해소제를 원한다 크게 외치거라. 그럼 없던 일로 눈감아주마. 물론 셋을 세기 전에 말해야 인정할 것이야. 그럼. 하나! 둘!...”
“저,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어서 해소제를 주십시오.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스무 명의 입이 동시에 열리며 해소제를 외쳤다. 그 간절함이란 마른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정도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셋을 외치기 전 모두 굴복하겠다 약조를 하였으니 약속대로 해소제를 내어주마. 앞으로 다시 한 번 개기는 날엔 이 꼴을 세 번은 더 당해야 할 것이니 다른 마음 먹지 않길 바라마. 자, 이것을 입안에 넣고 삼키거라.”
비담은 온갖 동물의 쓸개즙과 결합된 해소제 한 알씩을 무희들 입에 넣어 주었다.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쓴 약을 삼키는 게 고역이었으나 온몸에 수천마리의 개미가 달라붙어 간질이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담은 모두 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남은 항아리 스물도 시원하게 깨버리고 짧은 규칙 몇 가지만 나열하곤 이내 선예당 안으로 휘적휘적 사라졌다.
“앞으로 선예당에서 두 달 동안 나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환영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앞으로 황제폐하의 생신축하연에 진상될 춤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서 외출을 금하고 합숙을 하겠다. 그리고 어떠한 외부인사와의 접촉도 금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엔...알아서 상상하도록. 오늘 펼친 몇 가지 수는 내가 가진 비책들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깨어진 항아리조각들과 모래들 역시 반시진 안에 치운다.
곧바로 춤을 배우기 위한 기초체력단련을 마당에서 실시할 것이니 다치기 싫으면 알아서 말끔히 치우도록. 이상!”
자기 할 말만 딱 끝내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비담을 바라보며 무희들은 무슨 징그럽고 흉측한 벌레를 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저런 괴물과 두 달을 함께 지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여기저기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반 시진 후.
다시 나타난 비담은 말끔하게 정리된 마당의 모습에 흡족한 듯 100명의 무희들을 둘러보며 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 아주 좋아. 지금처럼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멋진 춤을 황제폐하께 헌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춤을 배우기 위한 예비 훈련을 시작하겠다.
황궁 밖에서 그동안 어찌 지내오고 자신이 어떤 춤을 추며 인정받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운다. 앞으로 내가 가르쳐줄 춤을 익히기 위해선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다.
고로 지금부터 체력단련의 시간을 갖겠다. 10열종대로 선다, 실시!”
“실~시!!”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무희들은 마당이 떠나가라 복창하며 서둘러 대열을 갖추었다. 비담은 모든 체력단련의 기본이 되는 기마자세를 주문했고, 무려 한 시진 동안 기마자세를 유지하느라 무희들은 땀을 비 오듯 쏟았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채근하고 협박하는 비담으로 인해 요령도 피울 수가 없었다. 비담은 점점 높아지는 무희들의 신음소리를 즐기듯 유유자적 대열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만!”
“하아!!”
그만이라는 말에 무희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제 감각마저 무뎌진 허벅지와 다리를 주무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닥에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괴물 같은 선예정랑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오늘 단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춤의 기본은 허리와 하체의 힘. 뿌리가 튼튼해야만 무성한 잎을 피워내듯 춤 역시 기본이 되는 하체가 튼튼해야만 유려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는 춤을 꽃피울 수 있다.
내 말 명심하도록. 그럼 오늘은 그만 숙소에 돌아가 쉬고, 내가 말한 대로 그 어떤 외부인사와의 접촉이나 외출은 금지다. 앞으로 한 배를 타게 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는 시간을 가지도록. 그럼 해산!”
비담은 옆에 서있는 하급관리에게 눈짓을 보냈고, 쪼르르 달려온 관리는 100명 무희들을 인솔하여 숙소로 안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