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진 후.
달게 잠을 잤는지 살짝 눈곱까지 낀 비담이 다시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당에는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몇몇 여인의 얼굴이 군데군데 붉은 반점과 함께 부어올랐다는 것과 양껏 꿀을 채취한 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인들의 눈빛이 까맣게 퇴색되어 죽어있다는 점.
비담은 만족스럽게 둘러본 후 여인들의 아혈을 풀어주기 위해 항아리주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다 제갈현아와 남궁소미의 핼쑥해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림의 여식에게도 벌은 두려웠던 모양이지? 매영 그년에게 모두 들은 이상 너희 둘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둘을 지나친 비담의 눈동자에서 스산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비담은 일련의 과정을 끝마친 후 예의 단상에 올라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첫 대면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이,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이곳에서 풀려나면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더러운 몸뚱이를 오체분시하여 저자거리에 던져 놓아야만 내 직성이 풀릴 것이야.”
악에 받쳐 발악하듯 외치는 여인의 말을 필두로 여기저기 비담을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비담은 한 번이라도 입을 뗀 여인들을 눈여겨보았다.
“후후, 이것들이 정신을 덜 차렸구나. 살려 달라 합창을 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단체로 죽여 달라 애원을 하는구나. 그깟 꿀벌 몇 마리 날아다닌 것 견식 했다고 지옥을 구경했다 간덩이가 부으면 큰 오산이지. 어차피 그것은 단순히 인사치레였고, 밥 먹기 전 물 한 잔 들이 킨 것에 불과하니까. 오냐! 지옥행 특급마차에 실어 보내주마. 다시 한 번 묻겠다. 내가 셋을 세기 전까지 마차에서 내릴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거라. 그렇지 않으면...상상은 너희들의 몫이다.
하나, 둘...셋!”
비담은 셋이라는 숫자와 함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여인들의 항아리는 그대로 부셔버렸다. 물론 점혈 당시 반탄력이 있었던 열 명은 입을 한껏 벌려도 제외시키는 섬세함과 배려도 잊지 않았다.
촤앙, 챙그랑.
비담의 손에 속절없이 날아간 항아리의 개수는 도합 쉰. 정확히 반절의 항아리가 부서져 나갔고, 그 안에 있던 여인들은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며 모로 쓰러졌다.
아직 마혈이 제압당해 모로 쓰러진 여인들은 안중에도 없이 비담은 그대로 항아리에 몸을 담구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감히 선예정랑인 나에게 반기를 들었겠다? 좋아. 내 정녕 이것만은 절대 만들지 않으려 했건만...굳은 결심 속에 봉인했던 내 최악의 조제 비방을 풀어 약을 만들어야 되겠군. 여봐라. 준비한 물품들을 어서 가져오너라.”
비담의 외침에 일꾼들이 끙끙대며 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탁자 위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더불어 천으로 덮여 정체를 알 수 없는 함도 여러 개 보였다.
비담은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며 공포에 떠는 오십 명의 무희들을 쓰윽 둘러본 후 주절거리며 물건들을 집어 조그마한 통속에 넣었다.
“내가 과거 천하를 돌며 주유하던 시절, 금기시되는 약품조제비법을 하나 배운 적이 있다. 이 비방을 가르쳐주신 분은 절대 이것이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하셨으나 너희들처럼 버르장머리 없고, 콧대 높은 것들에게는 이 약이 직방일 것이다.”
비담은 비 맞은 중마냥 주절주절 혼자 중얼거리며 약품들의 종류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것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준비된 통으로 던져 넣었다.
“교미 중인 암전갈의 꼬리 다섯 개, 더불어 한껏 발정이 난 개의 음낭 두 개, 갓 백일이 된 여자 아이의 오줌 세 숟가락, 번데기가 되기 직전의 구더기 열 마리, 보름달이 뜨는 날 묘지 주위를 기웃거리는 검은고양이의 꼬리털 스무 개......이게 말이다, 재료의 혼합에 있어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안 되거든. 만에 하나 약간이라도 오차가 생기면 이 약을 먹고 미쳐버릴 수도 있음이야. 한 때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도 잠깐 조는 바람에 꼬리털이 스물 한 개가 들어가고 만 거야.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 알아? 글쎄 이 약을 먹은 사람이 동네방네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자기 성기를 꺼내어 자랑을 하더란다. 뭐 그러다 일 년을 못 넘기고 죽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말인데 이 약을 조제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야 돼요. 흠흠, 가만 있자...내가 분명 검은고양이의 꼬리털을 스무 개 넣었던가...에라, 모르겠다.
”
방금 꼬리털이라며 의문의 털 뭉치를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담은 다시 한 번 똑같은 생김새의 털 뭉치를 한웅큼 집어 넣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무희들은 한 번 더 넣었다며 고래고래 발악을 하였으나 비담은 못 들은 듯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덤벙덤벙 물건들을 집어 넣었다.
방금 자신의 입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부작용이 없다 떠벌려놓고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행동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비담은 흥에 겨운 듯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천으로 뒤덮인 함을 그대로 공개하였다. 그 안에는 잔뜩 독이 오른 살모사 한 마리와 엄청난 냄새를 풍기는 의문의 동물이 털을 곧추 세운 채 성을 내고 있었다.
비담은 살모사의 머리 부분을 잽싸게 움켜쥔 후 그 녀석의 아가리를 벌려 독니가 드러나게 하였다.
“호오, 힘이 장사네. 모름지기 이만한 약을 만들기 위해선 이 살모사처럼 잔뜩 약이 오른 녀석의 침 몇 방울이 꼭 들어가야 하지. 가만 있자...어느 쪽으로 침이 나오더라? 세 방울이 꼭 들어가야 하는데 독이 나오는 구멍이랑 침이 나오는 구멍이 가물가물하네. 에라, 모르겠다. 이 구멍이 맞겠지 뭐.”
비담은 한껏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살모사의 입을 벌려 의문의 액체 세 방울이 통 속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 녀석의 독 한 방울이면 어른 서른 정도는 우습게 저승으로 보내지. 뭐 다행히 독이 아닌 침이 나오도록 만들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 가만, 살모사는 침과 독이 함께 나오나?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지도 동물이니 따로따로 나오겠지. 하아, 정말 그분의 설명만 듣고 처음 만들려다 보니 많이 헷갈리네. 대충 넘어가고. 그 다음으로 이 녀석 차례지. 이거 남만(南蠻)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동물이야. 이 녀석이 뿜어내는 방귀가 얼마나 독한지 남만 사람들도 이 녀석만 보면 기겁을 하고 건드리지 않더군. 글쎄 평생 후각을 잃는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 녀석의 방귀액도 조금 넣어줘야 약효가 제대로야.”
비담은 털을 곤두세운 채 항문을 자신 쪽으로 향하며 으르렁거리는 동물을 잽싸게 제압하여 방향을 통 쪽으로 틀었다. 순식간에 항문을 뚫고 터져 나온 분사액은 통 안으로 직행하였다.
만족한 듯 동물을 다시 함안으로 집어넣은 비담이 나무 몽둥이를 이용해 골고루 저었다. 보기만 해도 역겹고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은 액체가 통 안에서 휘돌았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흐르자 통 속의 액체는 점점 응고되어 끈적끈적 점성을 띠었다. 그러다 종래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비담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굳어버린 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히야, 모양과 빛깔이 제대로야. 예전에 그분께서 약을 만들었을 때랑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아. 가만, 그런데 약간 얼룩덜룩한 이것은 뭐지? 예전엔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뭐 별 문제야 생기겠어? 내가 이처럼 정성을 쏟고,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집중해서 만들었는데. 그분 말씀대로 이 약을 먹은 사람은 복종심이 뭔지를 뼈에 새긴다고 하였으니 아직도 상관에 대한 예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너희들에게 먹여야지. 자, 그럼 시식을 해볼까나?”
비담이 응고된 정체불명의 괴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다가오자 무희들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일련의 조제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이상 절대 저 약을 먹을 순 없었다.
비담은 사색이 된 그녀들을 실컷 놀리며 점찍어 둔 열 명에게 그대로 양껏 퍼서 입에 우겨 넣었다. 제갈현아를 비롯해 9명의 여인들은 애원하듯 발악하며 한사코 먹기를 거부하였으나 작정하고 퍼 먹이는 비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밀려드는 쓴 맛에 얼굴의 근육들이 저절로 경련하였고, 온 신경이 실시간으로 반응하였다. 비담은 토악질을 하려는 그녀들의 아혈을 친절하게 점혈 해주었고, 입을 굳게 닫아주는 섬세함까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까 눈여겨보았던 입을 열어 반항한 여인들에게도 한 숟가락씩 퍼 먹이고 똑같이 아혈을 제압해 버렸다.
‘후후, 인간은 상상이란 괴물에 잡아먹히는 순간 대항할 용기를 잃고 나약해지지. 실상은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낸 모조품들을 집어넣었으나 내가 떠벌린 말들로 인해 고스란히 믿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스스로 공포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뭐 인체엔 별 해가 되지 않으니 그냥 실컷 먹고 즐기거라.
특히나 너희 열 명은 한 번의 열외도 용납할 수 없으니 끝까지 나와 함께 하자고. 흐흐흐.’
“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라. 혹시나 마음이 바뀌었다면 내가 약을 먹이기 전 입을 크게 벌리고 살려 달라 애원하거라.”
비담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직 약을 먹지 않은 서른 명의 무희들은 앞 다투어 살려 달라 애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