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54)

91화

황궁의 서남쪽.

인공가산과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전각에 선예당이라는 현판이 붙음과 동시에 아리따운 무희들이 너른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예정랑의 직책을 받은 관리를 기다리는 동안 각자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갈현아와 남궁소미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무리에 섞여 앞으로의 일들을 의논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러기를 일식경.

드디어 마당으로 통하는 전각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말쑥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비담이 허세를 잔뜩 넣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곤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소란스러워진 마당의 100여명 무희들을 향해 우렁찬 사자후(?)를 터트렸다.

“조용! 개미 기어가는 소리라도 나면 확 엎어버릴 거니까 똑바로 정신 차립니다. 지금 황궁에 놀러 들어온 줄 아십니까?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눈을 부라리며 인상을 팍팍 구기는 비담으로 인해 마당에 모여 있던 100여명 무희들은 그만 어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말이 좋아 선예정랑이지 단순히 초빙된 임시교관에 불과한 자가 무슨 대단한 벼슬씩이나 받았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꼬락서니하며 자신들을 마치 아랫것들 대하듯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비담의 안하무인(眼下無人) 행태에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들 역시 무예(舞藝)라면 전혀 꿀리지 않았고, 그러한 실력을 인정받아 이곳에 초빙된 무희들이었기에 처음부터 주도권을 쥐고 가기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무희들의 표독스러워지는 눈빛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감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그러한 상황을 음미하듯 지켜보던 비담의 입매가 사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후후, 이리 나와야 재미있지.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를 위해서라도 좀 더 울분을 토하며 기어 오르거라. 그래야 내가 황상께서 베풀어주신 성은 운운하며 제대로 굴려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 년은 도대체 누구로 변신해서 섞여 있는 거야? 적시를 시전해도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는 역체변용술이라...아무튼 지가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감히 황제폐하께서 하사하신 벼슬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상관에게 그리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대드는 꼬락서니는 어느 나라 예법이고, 어떤 동네에서 배워온 개망나니 추태냐? 예로부터 배움을 청하기 위해선 자존심 다 버리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라 하였거늘 첫 대면부터 발끈 대드는 너희들의 행태를 보아하니 싹수가 노랗구나. 부채춤이고 나발이고 너희들 정신부터 제대로 개조시켜 놓아야 제대로 된 춤이 나올 듯싶구나. 정확히 셋을 세겠다. 그 안에 10열로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선다.

만약 내 입에서 셋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면...후후, 지옥을 구경시켜주마.”

비담은 동네 구경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거닐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비담의 입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나왔음에도 무희들은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한낱 춤이나 가르치는 교관이 자신들 100여명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자신들과 교관의 위치를 매듭짓겠다 단단히 벼르고 있었기에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기운만 감돌았다.

그리고 황제께 진상할 춤이 엉망진창이 되면 모든 욕과 책임은 저기 철부지관리가 질 것이기에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무희들이었다.

만에 하나 어설프게 기선제압을 당하게 되면 두 달 내내 피곤한 삶이 예약되어 있을 뿐이었다.

비담은 무희들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히 마지막 숫자를 외쳤다.

“셋!”

우렁찬 소리로 셋을 외친 비담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얄밉게 이죽거렸다.

“어이쿠! 이거 어쩌면 좋을까. 우리 콧대 높으신 무희아가씨들이 결국 내 입에서 셋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만들었으니. 뭐 지옥을 잠깐 둘러보며 견문을 넓히겠다는데 내가 일조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자고로 여행만큼이나 사람의 정신세계를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드무니 그럼 시작해 봅시다. 내가 말이야 과거 천하를 주유하면서 별 볼 일 없는 재주를 하나 익힌 게 있거든. 처음 당하면 조금 놀라겠지만 이것도 소중한 경험이다 생각하고 몸소 체험해보도록.”

비담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100여명에 달하는 무희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의 마혈과 아혈을 눌러버렸다.

전무후무한 기사에 무희들은 모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하지만 아혈이 제압당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마당은 어느새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점혈 당시 반탄력을 보인 여인이 도합 열. 무공을 익힌 흔적으로 보아 특정세력의 간자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갈현아와 남궁소미, 그리고 변신괴물을 제외하면 총 일곱이란 말인데...후후, 모두 똥물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지. 누가 보내서 이곳에 온 것인지 내 알바 아니나 앞으로 두 달 동안 단단히 각오해야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허수아비처럼 두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잔뜩 겁을 먹은 여인들을 둘러보며 비담은 괴소를 날리며 말했다.

“내 입에서 셋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순간 지옥을 경험한다 그리 일렀건만 야무지게 씹어 소화까지 시켰겠다? 그만큼 간덩이가 큰 년들이니 이정도 시련은 웃으며 견딜 수 있을 터. 여봐라. 준비한 것들을 어서 가져오도록 하거라.”

비담의 명령과 함께 황궁에 딸린 일꾼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가져다 날랐다. 물건의 정체는 성인 하나가 우습게 들어갈 정도의 큰 항아리들이었다.

10열종대로 가지런히 늘어서는 항아리의 행렬을 지켜보며 무희들은 두려움과 의혹들로 더욱 눈이 커졌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일한 일꾼들의 노고에 화답하듯 가지런한 항아리부대가 완성되었고, 비담은 수고했다는 무언의 인사를 건네었다.

그런 다음 돌처럼 굳어버린 무희들을 항아리 하나에 한 사람씩 차근차근 담더니 준비한 모래를 이용해 목까지 덮어버렸다. 무희들은 꼼짝없이 항아리 안에 갇혀 목 위로만 내놓은 형국이 되었다.

“히야, 이거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구먼. 귀여운 항아리 인형이 100개나 생겼어. 그나저나 황상께 받은 성은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춤과 미모를 가꿔야 되지 않겠니? 그런 의미로다 내가 피부에 반들반들 윤기가 돌도록 꿀을 발라주마.”

비담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딸랑딸랑 꿀통을 든 채 항아리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는 준비된 붓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무희들의 얼굴에 열심히 꿀을 바르기 시작했다. 무희들은 오만상을 쓰고 싶고, 질끈 눈을 감고도 싶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비담이 하는 대로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작업을 끝낸 비담이 밝게 웃으며 꿀통을 집어 던짐과 동시에 의문의 나무통 하나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하하하, 햇빛에 번들번들 빛나는 것이 한층 미모가 나아지겠어. 그나저나 꿀만 발라주면 조금 서운해 하겠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심심할 텐데 이 친구들이 재미나게 해줄 거야. 참, 그리고 경락을 시원하게 뚫어주고 혈기를 돋우는 데는 봉침(蜂針:벌침)만한 게 없다고 하니 사양하지 말고 실컷 맞아둬. 일생에 이런 천금 같은 기회는 흔한 게 아니거든.”

비담은 짊어지고 온 나무통을 그대로 개방해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꿀벌들.

윙윙, 웨에웽 웽웽.

선예당의 마당은 시커먼 벌떼의 급습으로 인해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고, 무희들의 얼굴은 노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렸다.

입을 벌려 어떻게든 소리치며 도망가고 싶었지만 항아리와 일심동체가 되어 꿈쩍도 할 수 없으니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리고 왜 저 가증스런 놈의 입에서 셋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기 전에 말을 듣지 않았을까 땅을 치며 후회하였지만 이미 깨어진 사발이고, 뛰쳐나간 송아지였다.

‘후후, 여인들은 여섯 발 달린 벌레와 다리 없는 짐승들을 유독 싫어하고 징그러워하지. 거기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들이 몸에 붙는다? 아마도 속으론 죽여 달라 애원하며 절규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니 벌들이 공격은 하지 않을 터. 뭐 개중에 이상한 놈들은 침을 쏘겠지만 소수에 불과할 것이고, 정작 두렵고 무서운 것은 눈앞에서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저놈들의 날개소리와 모습. 한 시진 늘어지게 자고 오면 깨끗이 해결되겠군. 감히 초장부터 어디서 기어오르려고.’

비담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여인들을 그냥 내팽겨 둔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다시 선예당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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