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한편 섬응탄(閃應彈)의 인수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제갈현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제야 한시름 놓고 다른 것들에 신경 쓸 여력이 생겼다.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경계하고 신경 쓴 것은 바로 비담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번 계획에 있어서 비록 미끼였으나 그의 실력과 아둔함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진 상태에서 계략을 짜야만 실패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에 여유가 생김과 동시에 남궁소미에게 부탁해 비담과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객잔 후원에 마련된 정원을 감상하며 마주 앉은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제갈현아는 아무런 내색 없이 그저 차분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비담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파악하기 위해 부산하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며 관찰하는 중이었다.
“검황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비 공자님의 부채를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라 마치 새가 너울너울 허공을 선회하며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시던데 정말 얼마나 현란하고 아름다운 모습일지 소녀는 상상조차 되지를 않네요. 마음 같아선 공자님의 선무(扇舞)를 감상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사 청해보고도 싶으나 괜히 번거로운 부탁은 아닐까 저어되어 선뜻 용기가 생기질 않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부족한 소생의 재주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별로 볼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재주이기는 하나 제갈소저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요? 괜히 외람된 부탁을 드려 공자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번거롭게 한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 하였사온데 이리도 흔쾌히 허락해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럼 공자님의 선무(扇舞)를 견식 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어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이처럼 총명하고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제 춤을 감상하고 품평해 주신다하니 오히려 제가 더 영광입니다. 그럼 부족한 솜씨이나마 한 번 펼쳐보겠습니다.”
비담은 허리에 꽂아진 화류선을 꺼내 촤라락 펼치더니 그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선법에 맞추어 보법을 밟음과 동시에 부채와 하나가 되어 너울너울 움직였다.
현기를 가득 담고 있는 비담의 동작 하나하나에 제갈현아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검황 어르신께 얼핏 듣기는 하였지만 저토록 오묘하고 아름다운 동선으로 움직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저게 정녕 선무란 말인가? 검황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니 오히려 검황 어르신의 평가가 부족함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움직임이야. 저 정도면 예부에 들어 춤을 가르치기에 차고도 넘치는 실력이야. 그리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승의 무리를 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무리 춤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자라하여도 저런 움직임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이야.’
엄청난 충격에 감탄성도 잊고 춤에 푹 빠져 구경하던 제갈현아는 어느덧 절정으로 치닫는 비담의 춤사위에 이제 심장마저 멎은 듯 몸과 사고 모두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현란하고 유려한 비담의 움직임들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후, 비담은 한바탕 춤이 끝났는지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멈추었고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앉아있는 제갈현아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소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조잡한 춤 실력을 선보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래도 나름 만족하셨기를 바랍니다.”
영혼이라도 빠져나갔는지 계속 정신을 못 차린 채 앉아있던 제갈현아는 비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을 쏟아내었다.
“저, 정말 너무 황홀한 춤이에요. 제가 여태껏 살아오며 공자님의 선무처럼 아름다운 춤을 감상했던 적은 결단코 처음이었습니다. 소녀의 눈과 마음을 크게 열어주신 공자님의 선무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선뜻 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만족하셨다니 무척 다행이네요.”
제갈현아의 칭찬이 마음에 흡족했던지 비담은 밝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더 많은 대화가 서로 오고갔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한 시진 가량 이어졌다.
비담과 후원에서 대화를 나눈 후 제갈현아는 곧바로 검황 남궁헌수와 남궁소미를 불러 제법 구체화된 계획들을 설명해 주었다.
“오늘 어르신의 말씀대로 직접 그자의 움직임과 선무를 견식 하였습니다. 정말 보통 실력이 아니더군요. 영롱한 현기마저 어린 것이 상승의 무예를 바탕으로 구성된 춤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그 자의 성정과 습관 역시 많은 부분 파악했고, 그걸 바탕으로 계획을 짜보았습니다.
우선은 제갈세가가 운영하는 서원을 통해 관에 진출한 관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부탁하여 이번 황제의 생신축하연에 필요한 예부의 관직 하나를 마련하라 이르겠습니다. 임시 특별직으로 하나 만들어 그에게 감투를 씌우고 춤을 가르치라 명하면 별 의심 없이 응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 태자인 주은명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이황자 주성은과 승상 쪽 인물들, 나아가 그들을 암중 지원하는 련의 인물들을 자극하면 됩니다. 그럼 그들은 잔뜩 경계한 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계획을 앞당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희들의 존재로 인해 거의 모든 관료들이 참여하는 이번 생신축하연에 맞추어 일을 벌일 공산이 큽니다.
여타의 준비들은 오정회의 지원을 바탕으로 제가 할 것이니 어르신과 소미는 비담을 감시함과 동시에 그자를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의심을 피하십시오. 앞으로 두 달. 모든 것이 그 때 결판날 것입니다.”
“알았다. 이번 황궁에서의 일은 모두 네게 일임했으니 차질 없이 준비하거라. 겉으론 내가 책임을 지고 있으나 모든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는 너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고맙습니다, 어르신. 오정회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이번 임무를 성사시킬 것이니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굳게 다문 입술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매가 제갈현아의 결심을 대변해 주었다.
이번 황궁에서 벌어질 사건의 오정회 측 최고책임자인 검황의 내락이 떨어지고, 천재적 두뇌를 자랑하는 제갈현아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 중 제갈세가에서 운영하는 운학서원 출신의 관료들은 나름 세를 형성하며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가주인 제갈선의 편지를 받자마자 흔쾌히 힘을 보태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준비과정을 통해 국가의 행사 및 의전을 담당하는 예부에는 선예당이 급조되었고, 더불어 특별 관리직인 선예정랑이란 자리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강력한 입김과 후광에 힘입어 아무런 제재나 시험 없이 비담은 바로 관리로 임용되었다.
물론 요식행위로 약간의 통과의례가 있기는 하였으나 어차피 짜고 치는 도박판이었기에 의미 없는 시험에 불과했다.
황궁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된 비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고, 처음 입어보는 관복 역시 어색했지만 푸르게 빛나는 빛깔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게 예부에 다다른 비담은 예부의 최고어른인 예부상서 조인문에게 임명장을 받고, 바로 자신이 머물며 선무를 가르치게 될 선예당으로 향했다.
선예당은 비어있던 황궁의 전각 하나를 꾸며 무희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었다. 그리고 넓은 마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춤을 가르치기엔 더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비담이 받은 선예정랑이란 자리는 이번 황제의 생신축하연에 선보일 부채춤을 구상하고 직접 가르치는 위치로 비록 관리이긴 하였으나 아무런 권세나 힘도 없는 그저 그런 별정직이었다.
그래도 가문의 영광이라도 된 듯 비담의 어깨는 당당히 펴져 있었고, 콧대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물론 그런 비담의 행동을 지켜보며 오정회 쪽 인물들과 사도련의 간자들은 코웃음을 쳤지만 말이다.
비담은 처음 제갈현아의 제안을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하면서 한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련의 간자들을 색출하고, 황궁에 드리워진 암운을 걷어내기 위해 당연히 자신이 발 벗고 나서겠으나, 아직 세상 경험이 미천한 자신이 만에 하나 실수를 저질러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제갈현아와 남궁소미 역시 무희로 위장하여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다.
물론 제갈현아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 터라 극구 사양했으나 완고한 비담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선예당의 무희로 참여하게 되었고, 남궁소미 역시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수락하게 되었다.
비담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관철되자 그때부터 허세와 권력에 맛 들여 천지분간 못하는 우자(愚者:바보)로 행세하며 황궁에서의 첫날을 의미심장하게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