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창문 너머로 희뿌옇게 동이 트는 새벽녘에 돼서야 매영은 비담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지는 비담의 공세로 인해 매영은 밤새 환락의 소용돌이 안에서 허우적거렸고, 자신의 원래 목적인 비담의 양물을 자르겠다는 생각은 시도조차 못해보고, 찌르르 울리는 하복부만 움켜쥔 채 방을 어기적어기적 빠져나갔다.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덮쳐오는 절정의 물결과는 대조적으로 비담의 양물은 한 번도 축 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더불어 이만한 기술과 하물을 지닌 사내의 상징을 댕강 자르기엔 아직은 많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 맛을 보고 싶은 게 매영의 솔직한 속내였고,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해줄 최음제 역시 넉넉히 확보된 상태였기에 좀더 지켜보며 즐기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비담은 짐짓 곯아떨어진 것처럼 연극을 하다가 매영이 방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연후에 바로 강신귀공을 운용하여 길천에게 의념을 전달하였다.
‘형님, 혹시 아는 얼굴입니까?’
‘후후후, 그년이다. 너의 양물을 자르겠다며 손톱의 날을 바짝 세웠던 그 독한년 말이다. 보아하니 수준 높은 역체변용술을 바탕으로 서동으로 변하여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검황 그 노인네를 대하는 태도가 영 못마땅해 하는 것이 존경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더군요. 그럼 둘의 관계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아마도 내 예상이 맞는다면 둘은 암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이야. 남궁가의 애송이 녀석이 조제한 최음제를 저 년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둘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인지, 아니면 다분히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동맹인지는 짐작하기 어렵고 속단하기에도 이르다.’
‘그럼 형님 말씀대로라면 저것들이 각자의 목적을 숨긴 채 우선은 손을 잡고 있다는 뜻인지요?’
‘그렇지. 저번에 고풍루에서도 내가 너에게 설명했듯이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둘이 지금 함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네가 방금 말했듯 동업자치고는 둘의 관계가 삭막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누군가 약점이 잡혀 이 상황이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남궁가의 년놈들일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명예에 덕지덕지 똥칠을 하고도 남을 최음제를 제조하여 저년 손에 고이 넘겨주진 않았을 터. 분명 저 년이 남궁가 녀석들의 약점을 쥐고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떤 약점이 잡혔을까요?’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허나 분명한 사실은 고풍루에서 저년이 너의 양물을 자르려다 포기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네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과 약점이 잡힌 남궁가의 녀석들이 그런 그녀의 계획을 도와주거나 방조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제 꽉 막혀있는 의문점은 하나만 남게 되지.’
‘왜 저에게 접근했을까?’
‘그렇지.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토대로 정리를 했을 때 너의 양물을 노리는 저년은 남궁가의 입장에서도 분명 불청객이고 전혀 예기치 못한 방해꾼이란 말인데. 그런 방해꾼을 도와주거나 그냥 내버려둘 정도로 남궁가의 녀석들이 저년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것도 사실이고.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찌하여 저년이 너에게 접근했냐는 것이지. 분명 검황 애송이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매우 위험한 도박임에 틀림없거든. 너에게 도대체 어떤 원한이 맺혔기에 그런 도박판에 선뜻 나선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까지 뱅뱅 네 주위를 맴도느냔 말이지. 설마하니 네 녀석의 양물 하나 자르지 못해 떠나지 않았다 치부하기엔 너무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겠냐? 누가 사내 양물 하나 자르겠다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살얼음판 같은 전장 한복판에 뛰어들겠냐고. 안 그래?’
‘형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아무리 고민하고 기억을 뒤져보아도 저 여인에게 지은 죄가 없는 데요? 결단코 처음 보는 여인이란 말입니다.’
‘후후, 저 여인과의 원한이 없더라도 특정 단체와는 척을 진 일이 있지 않느냐. 곰곰이 생각해봐.’
‘그럼 형님은 저 여인이 사도련에서 보낸 인물이란 말입니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다. 최근에 너와 대립하거나 사이가 껄끄러웠던 집단은 오직 사도련 하나일 테니. 물론 황보가의 철부지 녀석 하나를 손봐준 일도 있긴 하지만 저만큼 사특하고 요사스러운 고수를 섭외하여 네게 보내지는 않았을 터. 때로는 명문가라는 껍데기가 거추장스럽고 껄끄러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저만큼 사이한 무공을 익힌 고수를 마음껏 부려먹거나 혹은 의뢰를 넣을 수 있는 집단이라면 사도련 밖에 남지 않는다.’
‘후후후, 이것들이 아주 제 무덤을 가지런히 깊게도 파는군요. 그럼 저에게 접근하여 떠나지 않는 이유가 이번 황궁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라는 말인데.’
‘이제야 정확히 맥을 짚는구나. 아마도 처음엔 단순히 너를 손봐줄 요량으로 접근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요망한 남궁가의 녀석들이 너를 이용하려하자 적절히 중간에 끼어든 것이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모르는 어떤 약점을 잡은 것이 분명하고, 그걸 이용해서 여기 황궁까지 쫓아온 것이야. 왜냐하면 오정회 놈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간파하였기에 더 지켜보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지. 후후, 이렇게 놓고 보니 이제야 답답하게 꼬여있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리는구나.’
‘그렇다면 이대로 당해줄 수야 없죠. 그리고 차분하게 기다리며 저것들의 얄팍한 노림수를 역이용할 필요도 있고요. 제가 이만큼 당하고 굴욕까지 겪은 마당에 똑같이 셈을 해서 돌려줘서야 인정머리 없단 소리만 들을 테니 응당 원금에 다섯 배 정도의 이자까지 넉넉하게 덧붙여 돌려줘야 저쪽에서도 서운해 하지 않겠지요.’
‘흐흠, 원금의 다섯 배면 저것들의 정신이 번쩍 들기는 하겠군. 자고로 그만한 고리채는 함부로 쓰지 말아야 되겠다는 교훈도 배울 것이고. 그럼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당연히 저것들의 장단에 맞춰줘야지요. 우선은 그 변신괴물부터 흐물흐물 녹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지요. 그리고 적절히 오정회 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정보도 그년에게 흘릴 생각입니다. 그래야만 련이나 또 다른 배후에게 연통을 취하겠지요. 그 순간을 잘 포착하여 중간에 가로챈다면 확실히 그년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고, 나아가 역이용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남궁가 녀석들과 제갈세가의 여식의 동태도 눈여겨 파악해야지요. 만에 하나 그녀까지 이번 일에 연루되어 나에게 물을 먹이려 한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남궁소미와 제갈현아 모두 정기를 흡수함은 물론 평생 여자구실 못하도록 만들어 놓을 작정입니다.’
‘괜찮은 방법 같구나. 그런데 굳이 정기까지 취하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많지 않느냐? 예로부터 채화음적들이 무림공적이 되어 쫓겨 다닌 데에는 정기의 훼손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 역시 그것을 가장 경계하였기에 정기를 흡수하는 기술을 창안하고도 평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고. 만약 오정회의 여식들을 상대로 네가 정기를 흡수하여 폐인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무림에 일파만파 퍼지게 된다면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할 수도 있음이야. 심할 경우 계속 쫓기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하하, 형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어리석은 소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건드리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곳 북경에 오기 전 무림의 정세에 대해 흑막주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분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크게 한 판 벌어질 것이라 하더군요. 돌아가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사도련이 뭔가를 크게 준비한다 하더라고요. 더불어 제 구명줄이 될는지 모르겠다며 오정회의 치부를 하나씩 알려주더군요. 헤헤, 정말 고맙지 않습니까?’
‘그래? 정말 그런 게 있어?’
호기심이 동하는지 길천의 의념이 생기발랄하게 반짝하고 전달되었다. 비담은 길천의 성정 상 궁금한 것은 반드시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뜸들이지 않고 바로 설명을 해주었다.
‘당연히 있지요. 세상천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고, 위선과 욕심의 가면으로 자신을 숨긴 자들은 구린 냄새를 팍팍 풍기는 제대로 된 오물을 끌어안고 있는 법이지요. 형님께서 무척 궁금해 하시니 우선 제갈세가와 남궁세가의 치부만 가르쳐드리지요. 흑막주님의 정보에 따르면 제갈세가는 삼대구족이 멸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물건을 제조하여 비밀리에 사용하려 한다더군요. 아직 그 화탄의 명칭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제갈세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흑막의 정보원으로부터 최근 10년간 미세한 양의 유황이 계속 세가내로 반입되었다 합니다. 유황은 매우 민감한 물건으로 비밀임무를 맡는 일부 고관대작이 아니고서는 사사로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갈세가에서는 정말 극비리에 그것들을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반입했다 합니다.
흑막의 정보원 또한 우연한 기회에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여 보고하였고, 감이 유난히 발달한 흑막주님이 좀 더 면밀히 조사하여 약간의 소득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위험천만한 물건인 만큼 쉽사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분명 그와 같은 정황들만 살짝 흘려도 제갈세가를 압박하기엔 충분할 것이라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남궁세가는 현 가주의 동생인 창천검 남궁현호가 련과 손을 잡고 벌렸던 일련의 치부들이 상상불허라 하셨습니다. 자신이 모처에 숨겨둔 그 치부책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남궁세가는 무림에 발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파급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빌려주신다 하였으니 살짝 언급만 해도 될 것입니다. 저야 안에 적힌 내용까지는 세세히 알지 못하나 분명 냄새나고 더러운 치부들이 잔뜩 들어 있겠지요.
이렇게 세가의 치부와 약점들이 제 손안에 있는 이상 나를 건드린 대가를 돌려주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요. 평생 여자구실 못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지덕지해야 할 것입니다.’
‘호오, 그런 게 손에 있다면 세상 무서울 게 없지. 정말 네 말대로 여자구실 못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에 감사해야 되겠구나. 그렇다면 나 역시 찬성이다. 그런 썩어빠진 마음가짐을 가진 녀석들이 무림을 좀 먹는 것보다는 애초에 싹을 잘라 무림의 평화에 일조하는 게 훌륭하지. 암, 건드리지 않았으면 모르되 만약 건드렸다면 이미 각오는 했을 터.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밟아 놓아라.
’
‘당연히 그럴 겁니다. 무림에 출도하여 이처럼 크나큰 굴욕과 치욕을 당한 것은 처음이니까요. 정말 세상에 태어난 것을, 아니 세가에 태어나 여태껏 누려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후회하게 만들어줄 생각입니다.’
‘힘내게, 동생.’
짧은 응원의 말과 함께 길천의 의념이 끊겼고, 비담은 자신을 농락하려한 독한 년을 길들이기 위해 체력단련과 기술을 더욱 다듬으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