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54)
  • 86화

    제 10 장 황궁에 드리워진 암운(暗雲)

    호남성 장사에 위치한 사도련의 본진.

    그곳으로 막 한 마리의 전서구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전통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던 은영각주 문설란의 눈이 한껏 치떠지며 련주의 거처인 구마각을 향해 다급히 뛰쳐나갔다.

    “하아! 하아! 아~악!!”

    하지만 촌각을 아껴가며 달려온 문설란은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 가픈 신음소리에 발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기다리길 일각.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던져지는 소리가 났고, 나른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려나왔다.

    “들어오너라.”

    “죄송합니다. 워낙 긴급을 요하는 내용인지라...”

    “무슨 내용이냐?”

    “천면요희 매영으로부터 온 전갈입니다. 아직 마무리를 하지 못해 비담이란 자 곁에 당분간 머물겠다 하옵니다. 그런데 검황 남궁헌수와 백보지 제갈현아도 동행하고 있사온데 그자들이 향하는 곳이...황궁이라 하옵니다.”

    “황궁?”

    “그렇습니다. 혹시 저들이 미리 눈치를 채고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되옵니다. 어찌 처리하는 게 좋을는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다. 아마도 황궁에 머물고 있는 우리 쪽 세작이 일부러 흘린 정보가 들어간 모양인데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안 그래도 때가 무르익어 한 번에 쥐새끼들을 소탕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구나.”

    “그럼 저들이 황궁을 활보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씀이신지...?” 

    “우선은 그냥 내버려둔다. 태자를 밀어내고 이황자를 옹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승상 후도에게 약속했던 재물을 보내고, 흑살대 서른을 추가로 파견하거라. 우리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겠지만 결국 당하는 것은 저들이 될 것이다. 더불어 저 녀석들은 꼭꼭 숨어 태자를 돕고 있는 놈들과 연락을 취하고 접선할 것이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그러면 깔끔하게 태자 측 인물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원래의 계획대로 황제의 생신축하연회에 맞춰 일을 진행시키라 전달하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극현도는 희대의 승부사답게 강한 한 방으로 황궁 쪽의 일을 정리할 심산이었다.

    ‘후후, 쥐새끼처럼 숨어서 잘도 나의 일을 방해 했겠다? 이번 기회만 잘 활용한다면 숨어 있는 그 녀석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황궁을 내 손안에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극현도의 입매가 사악함으로 물들었다.

    한편 선화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나날이 회복되어 이제는 거동이 많이 자유로워진 이성보는 구인철과 마주앉아 있었다.

    “맹으로 떠나며 루주님의 신상에 대해 많이 걱정했는데 이리도 회복하신 모습을 뵈니 무척 다행이군요.”

    “모두가 두 분 공자님 덕분입니다. 아마도 두 분께서 저를 구하러 오시지 않았다면 그곳에 뼈를 묻었을 것입니다. 저를 구해주신 은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 역시 막주님의 배려로 호사를 누렸으니 마땅히 보답을 해야지요. 그리고 이제 한 식구가 된 담이와 친분이 있으신 분이니 당연히 저도 발 벗고 나서야지요.”

    “그나저나 동생분의 상심이 무척 크신듯한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휴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겠지요.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길이 엇갈렸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담이가 그리 말하던가요?”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떠난 뒤 대주님께서 낙양에 도착하시면 자신을 따라 황궁으로 오지 말고, 이곳에 남아 사도련의 움직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정보를 취합해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대주님을 도와 달라 부탁을 하셨습니다.”

    “담이가 그리 말한 것을 보면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닌가 보군요.”

    “그저 한바탕 어우러지며 자신을 농락한 자들을 손봐준다고 하였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모으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며 따로 당부의 말도 남기셨습니다. 자신이 황궁에서 돌아올 때까지 빙소저의 몸과 마음을 얻기를 바란다며 열심히 연습한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무얼 그토록 연습하셨습니까? 비 공자의 눈을 보니 기대와 장난기로 빛이 나던데...”

    “흐흠. 하여튼 그 녀석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차마 낯이 뜨거워 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담이 말대로 우선은 이곳에서 루주님의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비담의 당부를 전달하자마자 노을빛처럼 붉게 변하는 구인철의 얼굴을 보며 이성보는 알쏭달쏭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연습하고, 어떤 장면을 상상하였기에 과묵하고 침착한 구인철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하는 것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이성보였다.

    한편 시원하게 뻗은 관도 위를 마차 한 대가 미친 듯 내달렸다.

    낙양에서 북경까지 이어진 관도가 이 마차로 인해 때 아닌 몸살을 앓으며 흙먼지를 피워 올렸으나,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마차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락함마저 느낄 정도로 편안해 보일 지경이었다.

    마차 안에는 검황 남궁헌수를 비롯해 이남이녀가 타고 있었는데 모두 각자의 상념에 빠져 창문 밖을 응시하거나 살포시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동으로 변한 매영은 질식할 것만 같은 마차 안의 분위기가 소름끼치도록 어색하고 싫었지만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라질 연놈들. 아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황궁을 찾아가는지 내 알바 아니지만 이건 뭐 전쟁터에 끌려가는 병사들처럼 대화 한마디를 편하게 나누질 않으니 아주 돌아버리겠네. 그렇다고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올리겠다며 괜히 나섰다가 내 정체가 들통 날 수도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정말 숨이 턱턱 막히는 이런 분위기 딱 질색인데.’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 살아온 매영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노림수가 먹힐 수 있도록 자연스레 침묵을 고수했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

    ‘호호, 그나저나 정말 재미있는 조합이군. 보아하니 저 늙은이와 여우같은 계집애는 여전히 저 덜떨어진 녀석을 이용하려 혈안이 되어 있고, 제갈가의 앙큼한 저 년 역시 뭔가 꿍꿍이를 숨긴 채 기회만 기다리고 있어. 무림에서 똑똑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년이니 이미 내 정체를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그걸 감안하고도 서동의 신분으로 위장한 나를 순순히 받아준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직은 나랑 대적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인데. 아슬아슬 외줄을 타는 짜릿한 이 기분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모르겠군. 후후, 하지만 나 역시 이렇게 된 마당에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신나게 앞으로의 상황들을 즐겨보자고.’

    매영은 비릿하게 웃으며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문 밖 풍경들에 눈을 던진 채 상념에 빠져 있던 제갈현아 역시 일이 묘하게 꼬여버린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은 듯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저 여우같은 요희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구나. 안 그래도 황궁의 일을 정리하자면 머리 쓰고 신경 써야할 부분이 적지 않은데 저 년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소미에게 검황 어르신이 조제한 최음제를 요구한 것으로 보아 분명 또 다시 비담이란 자를 덮칠 것이 분명해. 떠도는 풍문으로 미루어 비담이란 자와 관계를 맺고 하물을 자르면 미련 없이 유유히 떠나겠지. 허나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 비담이란 자를 상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최음제의 조제시일을 늦춘 후, 북경에 당도하는 대로 어르신과 모용오라버니께 상의하여 저 년부터 제거해버리는 것이 좋겠어.’

    모종의 계획들을 세우느라 제갈현아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상념과 생각들을 실은 채 마차는 끊임없이 황궁이 있는 북경을 향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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