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휴우, 다행이네요. 오라버니 마음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사단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많이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검황 어르신께선 이미 미끼를 준비해 놓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 그러시던데. 비담인가 하는 제법 부채를 잘 다루는 무인이라 들은 것 같다만 더 이상의 말씀은 함구하시더구나.”
제갈현아의 별호는 ‘백보지(百步知)’.
‘백 걸음을 걷기 전에 모든 사실을 알고 깨닫는다.’는 뜻의 별호였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지낭들만 모여 있다는 제갈세가 내에서도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란 기재 중의 기재였다. 그런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숨겨진 내막을 말하라는 듯 남궁소미를 압박하자 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왈가닥 남궁소미로써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남궁헌수의 계획에 따라 어찌 비담을 회유하게 되었는지 모든 과정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똑똑하기로 무림에서 세손가락 안에 든다는 제갈현아인 만큼 자신에게 닥친 위기상황을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의 자문도 구하기 위해 정체불명의 기녀와 관련된 사항들도 하나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남궁소미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붙잡겠다는 일념으로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고, 제갈현아 역시 오정회의 앞날을 위해 하나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길었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제갈현아의 눈동자가 더욱 깊이 잠겨 들어갔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계획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남궁소미는 목이 타는 듯 앞에 놓인 찻잔의 물을 단숨에 비워버렸고, 제갈현아의 심사숙고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남궁소미가 그리 애타게 기다리던 제갈현아의 함초롬한 입이 벌어졌다.
“속단하기는 이르나 너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해본 결과 그녀의 정체는 천면요희가 틀림없다. 현 무림에서 그 정도 수준의 역체변용술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이는 그녀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세력에도 속해있지 않고 무림을 홀로 돌아다니는 그녀가 어찌해서 그자를 먹잇감으로 점찍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일이 고약하게 틀어져버렸어. 검황 어르신과 네가 꾸민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니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고.”
“그렇죠? 그것만 아니라면 증조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어찌 해보겠는데 저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 이리 언니께 털어놓은 거예요.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지금으로썬 뾰족한 방도가 없다. 그녀의 역체변용술이라면 놓쳤을 때 뒷감당하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거든. 그녀가 무림공적이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며 강호를 들쑤셔 놓았어도 아직 목이 온전히 제자리에 붙어있는 것만 보아도 그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지. 우선은 그녀가 해달라는 대로 장단을 맞춰준 연후에 도망갈 구멍이 없는 치명적인 함정을 파야 된다. 그래야 뒤탈 없이 깨끗이 묻을 수 있어.”
“알았어요. 그럼 언니말대로 우선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야 되겠네요.”
“서동이라...혹시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니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럼 모용오라버니에게도 연통을 넣어 저희 뒤를 따라오라 하시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구나. 모용오라버니 실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시간이 촉박하니 당장 그녀가 묵고 있다는 숙소로 찾아가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그 녀석의 서동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거라. 모용오라버니께는 내가 연락을 넣으마.”
“고마워요, 언니.”
“아니야, 모두가 오정회의 앞날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고마워하지 말거라. 그리고 당분간은 천면요희가 긴장하며 경계할 것이니 검황 어르신께도 함구하고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할게요.”
제갈현아와 헤어진 남궁소미는 곧바로 비담을 찾아가 황궁에 암약하고 있는 련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청했고,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비담 역시 흔쾌히 승낙하였다.
비담으로부터 승낙을 받아낸 남궁소미는 매영이 일러준 장소로 찾아가 그녀에게 비담의 서동이 될 기회를 마련했다고 알렸다.
제갈현아는 일련의 과정들이 매끄럽게 처리되도록 중간에 나서서 일을 진행시켰고, 남궁헌수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서동을 받는 것에 허락했다. 그런 다음 황궁까지의 여정을 위해 사람들에게 준비할 것들만 간단히 이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비담을 포함해 남궁헌수, 남궁소미, 서동으로 변한 매영, 제갈현아,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모용천까지 모두 각자의 목적을 숨긴 채 황궁이 있는 북경으로 향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준비를 갖춘 일행은 황궁이 있는 북경으로 출발했고, 우연의 일치인지 비담 일행이 낙양을 떠나던 그 시각 구인철과 구서희가 낙양에 당도하였다. 비담을 만날 수 있다는 서희의 기대와 떨리는 마음을 가득 안고 말이다.
“정말 너무 좋아요. 도대체 오라버니께서 비 공자님에 대해 뭐라 말씀하셨기에 아버지께서 선뜻 허락해 주셨는지 아직도 꿈만 같아요. 이제 공자님께서 계시는 낙양에 도착했으니 곧 만날 수 있겠지요?”
“낙양까지 오는 내내 먼지 들어간다고 그리 타일렀건만 아직도 입을 헤 벌리며 웃고 있는 것이냐? 무슨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 뭐 아무튼 시간이 좀 걸렸다만 이리 낙양에 당도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게다.”
“헤헤, 빨리 오세요.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리 놀리시면 정말 화낼 거예요?”
“하하, 원 녀석도. 천천히 가.”
한편 매영은 낙양을 벗어난 순간 일행의 눈을 피해 전서구 한 마리를 날렸다. 전서구는 기운찬 날갯짓과 함께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매영이 적은 몇 줄의 글과 함께.
-급 전-
그동안 련의 밥을 축낸 것이 미안하여 밥값을 좀 하겠습니다.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으나 비담을 포함해 검황과 그의 증손녀, 제갈현아가 황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직 흡족한 성과를 내지 못해 계속 비담 주위에 머물며 정보를 보낼 것이니 알아서 판단하시길. 그럼.
잠잠했던 구중심처, 그곳에 지금 폭풍이 불어 닥치려 하였다.